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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우리가 무조건 하나라는 거대하고도 괴로운 착각”

등록 2019-01-25 06:00수정 2019-01-25 14:36

황정은 연작소설 ‘디디의 우산’
디디의 죽음과 도도가 만난 혁명
레즈비언 커플에겐 아직 미완인…
디디의 우산
황정은 지음/창비·1만4000원

황정은의 연작소설 <디디의 우산>은 ‘d’(디)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두 중편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수록작 ‘d’와 책 제목에 대해서는 조금 설명이 필요하다. 우선, 2012년에 낸 소설집 <파씨의 입문>에 단편 ‘디디의 우산’이 들어 있었다. 2016년 소설집 <아무도 아닌>에는 그가 2014년에 발표했던 ‘웃는 남자’라는 단편이 실렸다. 그리고 이번 책에 묶인 ‘d’는 애초에 <창작과비평> 2016년 겨울호에 ‘웃는 남자’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바 있다.

작가의 의도야 어떻든 독자쪽에서는 상당한 혼란이 불가피한 셈인데, ‘디디의 우산’에서 단편 ‘웃는 남자’를 거쳐 중편 ‘웃는 남자’(‘d’)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도도’ 또는 ‘디’로 불리는 남자와 그의 초등학교 동창이자 연인인 ‘디디’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하나로 꿸 수 있다. ‘디디의 우산’은 지난 소설집의 수록작 제목이기도 하지만, 그 제목을 표제로 삼은 이번 책에 실린 ‘d’에서도 중요한 모티브로 구실한다. 그 중요성은 ‘d’의 범주에 한정되는 것도 아니어서, ‘d’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사이에는 단편 ‘디디의 우산’에 나온 문장 “모두가 돌아갈 무렵엔 우산이 필요하다”가 두 중편을 잇는 가교처럼 자리해 있다.

연작소설 <디디의 우산>을 낸 작가 황정은. 단편 ‘디디의 우산’에서부터 이번 책까지 4년 반이 걸렸다며 그 사이 “욕이 조금 늘었는데 여전히 읽기와 쓰기를 사랑하고 사람을 좋아합니다”라고 ‘작가의 말’에 썼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연작소설 <디디의 우산>을 낸 작가 황정은. 단편 ‘디디의 우산’에서부터 이번 책까지 4년 반이 걸렸다며 그 사이 “욕이 조금 늘었는데 여전히 읽기와 쓰기를 사랑하고 사람을 좋아합니다”라고 ‘작가의 말’에 썼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단편 ‘웃는 남자’와 비슷하게 ‘d’의 앞부분에서도 주인공 디는 연인 디디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만사를 작파하고 함께 살던 반지하 방에 칩거한다. “dd를 만난 이후로는 dd가 d의 신성한 것이 되었”고 “dd는 d에게 계속되어야 하는 말, 처음 만난 상태 그대로, 온전해야 하는 몸이었”기에 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공항 식자재센터에서 식판 씻는 일을 하다가 dd의 죽음을 겪으며 일을 그만두었던 그가 “종로구 장사동 세운상가에 새로운 일자리를 얻”어 출근하면서 소설은 말하자면 ‘죽음 이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이야기가 무엇인지에 앞서, 세운상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운상가는 황정은의 첫 장편 <백의 그림자>에 인상적으로 등장했던 공간이며,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도 주인공 자매 아버지의 오랜 일터가 있는 곳으로 나온다. 그러니까 이 책의 두 중편은 우산과 함께 세운상가라는 매개를 통해서도 이어지는 셈이다. 그리고 뒤에서 보게 되거니와, 둘을 잇는 또 다른 매개가 ‘혁명’이다.

세운상가에서 택배를 수집하고 상차하는 일을 하던 디는 우연히 오디오의 세계에 입문하며, 자신과 디디의 초등학교 동창인 박조배와 함께 세월호 1주기를 추모하는 광화문 집회를 목격하게 된다. 박조배는 한때 혁명에 심취했었고 그때 읽었던, “REVOLUTION이라고 적힌 책”을 디디에게 빌려주었던 인물. “조배야 이것이 혁명이로구나. d는 생각했다. (…) 혁명은 이미 도래했고 이것이 그것 아니냐고 d는 생각했다. 혁명을 거의 가능하지 않도록 하는 혁명… 격벽을 발명해낸 사람들이 만들어낸 혁명.”

디와 조배가 목격한 세월호 1주기 집회에는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의 주인공 ‘나’와 그의 동성 연인 서수경도 참가한다. 그런데 앞서 디가 그 집회를 두고 했던 ‘혁명’에 관한 언급과는 다른 결의 말이 ‘나’에게서 나온다. “그래서 오늘은 그날일까. 혁명이 이루어진 날.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혁명은 마침내 도래한 것일까.”

연작소설 <디디의 우산>을 낸 작가 황정은.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연작소설 <디디의 우산>을 낸 작가 황정은.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나’의 이 말은 더구나 헌법재판소가 전직 대통령 탄핵을 공표한 날 나온 것이어서 주목된다. 혁명에 대한 ‘나’의 이런 유보적이고 회의적인 태도는 무엇 때문일까. 서사보다는 관찰과 논평이 두드러지는 이 에세이풍 소설에서 황정은은 매우 다채롭고도 강력한 페미니즘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1996년 연세대 사태, 직장 내 성희롱, 딸 둘을 둔 아버지의 열악한 젠더 감수성은 물론, 촛불집회장의 여성 혐오, 동성 연인을 바라보는 뒤틀린 시선, 나치의 차별 시스템에서 남성 동성애를 가리키는 표식은 있지만 “레즈비언의 낙인/상징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거나 멀고 가까운 차별과 배제의 구조를 황정은은 꼼꼼히 기록하고 날카롭게 해부한다. 촛불 광장을 지배했던, “우리가 무조건 하나라는 거대하고도 괴로운 착각”은 촛불 혁명 이후 분출하고 있는, 페미니즘을 필두로 한 정체성 정치에 대한 예고이자 경고로 들린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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