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1, 2 필립 쇼트 지음, 양현수 옮김/교양인·각 권 2만9000원
1934년 12월, 국민당 군대의 추격을 피해 ‘대장정’에 나섰던 중국공산당 홍군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 있었다. 출발한 지 두 달 만에 연전연패해 8만6천명 병력의 3분의 2를 잃었다. 소련의 지지를 받던 지도부는 어디로 가야 할지조차 알지 못했다. 이 위기 속에서 지도력을 발휘한 인물이 마오쩌둥이었다. 그는 이때 쥔 권력을 죽을 때까지 놓지 않았다.
영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필립 쇼트가 쓴 <마오쩌둥>은 마오가 권력을 쥔 이 시기에서 시작해 예민한 전략가이자 정치가, 시인이자 폭군이었던 그의 복잡하고 다면적인 면모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1999년 나온 초판이 호평을 받았지만, 지은이는 이후 공개된 중국과 러시아 자료와 각종 최신 연구, 자신이 직접 인터뷰한 마오쩌둥의 가족과 최측근들의 증언을 더해 2017년에 전면 개정판을 냈다. 이번에 나온 한글판은 이를 번역했다.
1935년 중국 옌안 시절의 저우언라이(왼쪽)와 마오쩌둥(오른쪽). 두 사람은 1932년 처음 의기투합해 이후 40년 넘게 정치적 파트너로 공조한다. 교양인 제공
1300쪽이 넘는 책 앞에서 ‘왜 지금 다시 마오의 생애를 살펴야하는가’라는 질문이 떠오르게 마련이다. 이 책은 마오가 어떻게 자신을 “진시황의 계승자”라 자임하며 절대 권력을 휘두르게 되는지, 마오와 혁명 동지들의 관계가 어떻게 중국인들의 삶을 뒤흔들었는지를 깊숙이 파고들며 그에 답한다.
대장정이 끝난 시점부터 마오는 자신이 예외적인 인간이며 특별한 역할을 할 운명으로 태어났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1949년 내전에서 국민당에 승리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뒤, 중난하이의 옛 황제 거처에서 소수의 사람에게 둘러싸인 말년의 마오는 무제한의 권력을 누리면서 보통 인간들로부터 더욱 멀어진 고독한 절대 권력자로 점점 더 변해간다. 제국 체제의 정상에 선 마오는 스스로에 대해 “마르크스와 진시황의 결합”이라는 말을 했다. 중국의 한 역사학자는 이렇게 지적했다. “이런 체제 안에서 ‘모든 관리는 두 얼굴을 한다. 상급자 앞에서는 노예이고, 하급자 앞에서는 폭군이다.’”
비현실적인 ‘대약진’ 실험으로 인한 3600만명 이상의 죽음과 문화대혁명의 비극은 왜 벌어졌는가? 이 책은 마오의 절대 권력에 감히 아무도 도전하지 못했던 중국 지도부의 권력 구조가 비극의 원인이라고 답한다.
1938년 11월 중국 옌안에서 중국공산당 지도부. 앞줄 왼쪽부터 캉성, 마오쩌둥, 왕자샹, 주더, 샹잉, 왕밍, 뒷줄 왼쪽부터 천윈 보구, 펑더화이, 류사오치, 저우언라이. 교양인 제공
대약진 실패로 인한 비참한 굶주림과 절망적인 현실에 대해 직언하려 했던 국방부장 펑더화이는 루산회의에서 숙청됐다. 이후 중국 지도부 내의 누구도 현실을 제대로 얘기하려 하지 않았으며, 각자의 권력과 안위를 지키는 데 급급했다.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 마오의 동료들은 대부분 기아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었고 국가의 식량창고도 가득 차 있었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식량 보유분을 방출했다면 1천만명 이상이 목숨을 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주석이 말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 지도부의 비겁합과 이기주의는 문혁이 시작되는 1966년에 더욱 두드러졌다. “만약 문혁 초기에 지도부가 힘을 모아 마오를 멈추게 했다면 장차 자신들에게 닥칠 대재난을 방지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려면 마오에게 정면으로 맞서야 했다. 그런 싸움을 벌일 만큼 배짱 있는 사람이 없었다.”
마오와 저우언라이의 미묘한 관계도 주요 주제다. 이 책에서 그려진 저우언라이는 마오의 라이벌로서 권력 투쟁을 벌이다가 복종한 이후 평생 마오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동지들을 배신하기를 서슴지 않고,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우선한다. “저우언라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주석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 누구라도 배신했기 때문이다. 문화대혁명 시절 덩샤오핑을 가장 혹독하게 비판한 당 지도자는 저우언라이였다.”
지은이는 개정판의 후기에서 “마오가 죽은 지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여전히 마오가 설정한 근본적인 정책 방향이 중국을 이끌고 있다”고 진단한다. 중국공산당은 1981년 결의에서 문화대혁명은 “인민공화국 창설 이래 가장 심각한 퇴보와 손실을 초래했다”고 선언하면서 “거대한 격변에 대하여 주요한 책임은 사실상 마오쩌둥 동지가 질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1978년 중국공산당 11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에서 덩샤오핑은 비공개연설을 통해 마오가 “70%는 잘했고 30%는 잘못했다”고 규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진지한 토론과 반성, 교육은 봉쇄됐다. 점차 중국의 텔레비전과 영화 속에서는 마오는 ‘99%는 잘했고 기껏해야 1% 잘못했다’는 식으로 묘사됐다. 항일투쟁과 국공내전을 주제로 마오를 신격화하는 프로그램이 끝없이 방송되었다.
1949년 10월1일 새 정부의 국가주석으로 취임한 마오쩌둥이 베이징 톈안먼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하고 있다. 교양인 제공
왜 중국 지도부는 절대다수의 인민에게 마오쩌둥을 성스럽고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되는 이미지로 각인하려 하는가? 공산주의와 점점 더 멀어진 중국공산당의 권력 독점을 정당화하는 것은 경제 발전으로 생활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는 당의 능력과 당의 역사다. 중국공산당은 마오쩌둥의 지도 아래 중국의 1백년이 넘는 혼란과 모욕의 시대를 종결하고 인민의 민족적 자부심을 회복시킴으로써, 1949년 중국을 통치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했다고 강조한다.
중국 혁명에서 마오는 레닌의 역할만이 아니라 스탈린의 역할도 수행했다. 그리고 더 깊은 차원에서 보면 오늘날 시진핑이 이끄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초대 황제 역할도 하고 있다. 마오의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손상하면 전체 체계가 무너질지도 모른다.
1954년 10월1일, 베이징을 방문한 북한 김일성 주석(왼쪽)과 함께 열병식을 지켜보는 마오쩌둥 중국 주석(오른쪽). 교양인 제공
“이런 마오 숭배의 분위기를 이용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 한 자가 (몰락한 충칭 당서기) 보시라이였고, 보시라이가 투옥된 이후 시진핑은 자신의 경쟁자가 사용한 수법을 그대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개혁개방과 경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당내 불만을 겨냥해, 시진핑은 마오라는 보호막이 필요하다. 마오의 이미지를 이용해 시진핑은 덩샤오핑이 구축한 권력 견제장치를 허물고 1인 권력을 강화하고 있다.
1946년의 마오쩌둥과 그의 큰아들 마오안잉(오른쪽). 안잉은 중국인민지원군에 자원입대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1950년 11월25일 전사했다. 교양인 제공
반면 중국의 현실에 불만을 가진 학생, 노동운동가들, 거리의 ‘라오바이싱’(보통 사람)들도 마오의 초상화와 기치를 들고 저항에 나선다. 중국 대학가에선 마르크스주의와 마오 사상을 공부하며 노동운동에 나섰던 대학생들이 체포되고 탄압받고 있다. 중국의 권력자들도 저항자들도 모두 마오의 깃발을 들고 있다.
죽은 마오가 오늘의 중국을 기묘하게 지배하고 있다. 마오를 알지 못하면, 지금의 중국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