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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여성 노동자들이 잠시나마 주인공이었던 무대

등록 2019-02-01 06:01수정 2019-02-08 14:22

클럽 배경삼은 소설 ‘줄리아나 도쿄’
신인작가 한정현의 개성있는 첫 장편
데이트 폭행과 작곡가 정추 이야기도
줄리아나 도쿄
한정현 지음/스위밍꿀·1만2000원

‘줄리아나 도쿄’는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일본 도쿄에 있었던 나이트클럽이다. 가수 이정현의 부채춤과 개그우먼 그룹 셀럽파이브의 군무가 이 클럽에서 유래했다는 설명도 있다. 이 이름을 제목 삼은 한정현의 소설은 줄리아나 도쿄가 상징하는 사회사적·문화사적 의미를 밑그림으로 깐 채, 현재를 사는 한국 여성 한주와 일본 남성 유키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공부하던 한주는 동료 대학원생이기도 했던 연인의 지속적인 데이트 폭행 때문에 자살을 기도했다가 되살아나지만, 그 충격으로 한국어를 잊고 일본어만 말할 수 있는 ‘외국어증후군’에 걸린 채 도쿄로 온다. 도쿄에서 그가 일하게 된 서점 동료인 유키노는 한국인 동성 연인 한수의 폭력과 협박에 시달리는 처지. “그냥 돈을 합쳐 안전과 공간을” 확보하자는 뜻에서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하고, 닮은꼴인 서로의 상처를 위로하면서 점점 가까워진다. 그러나 한수의 협박이 거듭되고 급기야는 그 협박이 한주에게까지 향하게 되자 유키노는 어느 날 문득 사라지고, 1년 뒤 부산에서 살인 미수 혐의로 체포된다.

<줄리아나 도쿄>는 길지 않은 소설이지만 그 안에는 매우 다양한 결과 층위를 지닌 이야기들이 담겼다.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친절하면서도 유독 연인인 한주에게만은 일방적이며 폭력적인 연인. 자신이 당한 모욕과 좌절을, 사랑하는 사람을 학대하는 것으로 되갚는 사람. 자신도 공부를 하고 싶다는 한주를 비웃으며 닥치는 대로 때리는 남자. “내가 죽어서라도, 그 사람의 인생이 산산조각나길” 바라게 되는 데이트 폭력에 대한 고발이 강렬하다.

그런 점에서 유키노의 어머니가 젊은 시절 고향 오키나와에서 당했던 납치와 폭행, 그리고 역시 오키나와 클럽들에서 미군들이 현지 여성들에게 행한 폭력과 살인은 한주가 연인에게 당한 폭력의 변형된 형태들이라 할 수 있다. 납치 사건 뒤 오키나와를 떠나 도쿄로 온 유키노 어머니는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이면 줄리아나 도쿄 클럽에서 청소부로 일하던 중 갓 낳은 채 버려진 유키노를 발견하고 자식 삼아 키운다.

2015년 신춘문예 등단 뒤 첫 책으로 장편소설 <줄리아나 도쿄>를 낸 작가 한정현. ‘줄리아나 도쿄’는 1990년대 초 일본 도쿄에 있었던 나이트클럽의 이름이다. 스위밍꿀 제공
2015년 신춘문예 등단 뒤 첫 책으로 장편소설 <줄리아나 도쿄>를 낸 작가 한정현. ‘줄리아나 도쿄’는 1990년대 초 일본 도쿄에 있었던 나이트클럽의 이름이다. 스위밍꿀 제공
유키노 어머니는 공장의 동료 여성 노동자를 클럽에서 마주치기도 하는데, 도쿄의 공장지대 근처에 자리잡은 이 클럽 손님 중에는 여성 노동자들이 상당수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소설 속에서 그런 추정을 하는 인물은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문화사회학자 김추. 그는 줄리아나 도쿄와 전투적 학생운동 조직 전공투(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를 비교 연구하는 논문에서 줄리아나 도쿄와 여성 노동자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한주와 유키노의 이야기로 전개되던 소설에 김추가 등장하는 것은 3분의 2 지점쯤에 와서인데, 그 자신 한국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꿈과 현실을 다룬 석사논문을 썼던 한주가 김추의 논문 발표회에 참석한 것이 계기가 된다. 그리고 김추의 이야기는 그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윤이상의 음악을 공부하겠다며 한국으로 유학 온 일본인 어머니와 대학 시위에 참가했다가 최루탄이 발사되는 현장에서 옛 소련 출신 망명 작곡가 정추의 음악을 트는 노동자 아버지의 사랑 이야기는 다소 비현실적일 정도로 낭만적이다.

유키노가 한주를 향한 연민과 동지애 때문에 한수를 칼로 찌르게 된 구체적 정황은 소설 마지막 장인 5장에서 드러난다. 5장에 이어지는 ‘번외’ 장은 김추의 어머니가 화자가 되어 김추 아버지와의 사랑을 회고하는 내용이다. 전공투를 테러리스트라 비난하는 아버지와 ‘적어도 그들은 반성이라는 걸 하려고 했다’며 옹호하는 오빠 사이에서 갈등하고 망설이던 그이는 노동자 투사인 김추의 아버지와 결혼하면서 확실히 입장을 정한 셈이 된다. 김추가 줄리아나 도쿄와 전공투를 비교 연구하는 것은 이런 부모의 사랑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라 하겠다. 한주-유키노의 이야기와 김추 가족의 이야기가 줄리아나 도쿄라는 나이트클럽을 매개 삼아 다소 느슨하게 결합되어 있는 소설이다. 한정현은 201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이 소설은 그의 첫 책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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