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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소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등록 2019-02-01 06:01수정 2019-02-01 18:19

소설&지도
앤드루 더그라프·대니얼 하먼 지음, 한유주 옮김/비채·2만2000원

소설은 특정 시공간을 배경으로 인물의 행동을 그린다. 독자는 소설을 읽으면서 인물의 생김새와 그가 움직이는 배경을 머릿속에 그려 보게 된다. 미국의 일러스트레이터와 편집자가 협업한 <소설&지도>는 그런 독자의 일을 대신 해 주고자 한다. 구미의 소설과 희곡, 시 19편의 무대를 지도로 그리고 작품마다 짧은 에세이를 곁들였다.

서구 문학의 맨 앞자리에 놓이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를 그린 지도는 트로이에서 북아프리카 해변에 이르는 지중해의 실제 모습에다 연꽃 열매를 먹는 사람들,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 마녀 세이런이 사는 섬 같은 가상의 공간이 추가된 모습이다. 전체 5막으로 이루어진 셰익스피어 희곡 <햄릿>은 주인공들이 사는 성을 밑그림으로 삼은 5개의 조감도에 각 막과 장의 배경을 부각시킨 뒤 인물별 동선을 여러 색깔 실선으로 표시함으로써 공간과 행동을 함께 담을 수 있도록 했다.

<로빈슨 크루소>가 정착해 사람이 살 만한 공간으로 조성한 섬의 지도. 비채 제공
<로빈슨 크루소>가 정착해 사람이 살 만한 공간으로 조성한 섬의 지도. 비채 제공
<로빈슨 크루소>에는 세 개의 지도가 달렸다. 첫 지도는 바다 한가운데 외롭게 떠 있는 섬을 공중 높이에서 내려다본 모습이고, 두 번째는 주인공이 짐승과 야만인, 배고픔과 외로움에 포위된 어두운 톤의 지도이며, 세 번째는 농장을 개척하고 성을 축조해 생존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꾼 “성경 속 에덴동산과 유사”한 섬의 모습이다. <모비딕>의 지도로 지은이들은 포경선이 출항한 낸터킷과 광활한 바다를 과감하게 포기하고 “포경선과 고래라는 두 용장에 집중했다.”

<80일 간의 세계일주> 지도에는 증기선과 철도는 물론 돛을 단 썰매와 코끼리 등 당시의 탈것이 사실대로 등장한다. 비채 제공
<80일 간의 세계일주> 지도에는 증기선과 철도는 물론 돛을 단 썰매와 코끼리 등 당시의 탈것이 사실대로 등장한다. 비채 제공
또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는 “당시의 탈것을 실제 모습대로 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직 비행기가 나타나기 전 장거리 여행의 유력한 두 수단이던 증기선과 철도는 물론 돛을 단 썰매와 코끼리 역시 운송 수단으로 지도에 등장한다.

보르헤스 단편 ‘바벨의 도서관’을 그린 지도. 비채 제공
보르헤스 단편 ‘바벨의 도서관’을 그린 지도. 비채 제공
도서관 형태의 우주를 꿈꾸었던 보르헤스의 단편 ‘바벨의 도서관’ 지도가 특히 흥미롭다. 이 소설의 도서관-우주는 육각형 전시실이 무한히 이어져 있는 구조인데, 각각의 육각형은 사면에 책이 꽂힌 선반이 있고 마주 보는 두 면에는 출입구가 나 있으며 여섯 면 모두에 위아래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이 나 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지만 인간의 척도로는 비좁고 폐쇄공포를 유발”하는 이 도서관-우주의 지도는 무채색에 가까운 색조로 단조롭고 반복적인, 감옥 같은 공간 감각을 극대화했다.

앞서 <소설&지도>가 독자를 대신해 소설 배경을 그려 준다고 했지만, 책의 의도는 독자의 수고 또는 즐거움을 면제시키거나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다. “자기 위치를 확인하기보다는 길을 잃어버리는 게 목표”라는 말처럼, 독자가 책 속 지도에 갇히지 말고 새로운 길을 찾아 자신만의 지도를 작성해 보라는 것이 지은이들의 제언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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