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지도앤드루 더그라프·대니얼 하먼 지음, 한유주 옮김/비채·2만2000원
소설은 특정 시공간을 배경으로 인물의 행동을 그린다. 독자는 소설을 읽으면서 인물의 생김새와 그가 움직이는 배경을 머릿속에 그려 보게 된다. 미국의 일러스트레이터와 편집자가 협업한 <소설&지도>는 그런 독자의 일을 대신 해 주고자 한다. 구미의 소설과 희곡, 시 19편의 무대를 지도로 그리고 작품마다 짧은 에세이를 곁들였다.
서구 문학의 맨 앞자리에 놓이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를 그린 지도는 트로이에서 북아프리카 해변에 이르는 지중해의 실제 모습에다 연꽃 열매를 먹는 사람들,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 마녀 세이런이 사는 섬 같은 가상의 공간이 추가된 모습이다. 전체 5막으로 이루어진 셰익스피어 희곡 <햄릿>은 주인공들이 사는 성을 밑그림으로 삼은 5개의 조감도에 각 막과 장의 배경을 부각시킨 뒤 인물별 동선을 여러 색깔 실선으로 표시함으로써 공간과 행동을 함께 담을 수 있도록 했다.
<로빈슨 크루소>가 정착해 사람이 살 만한 공간으로 조성한 섬의 지도. 비채 제공
<로빈슨 크루소>에는 세 개의 지도가 달렸다. 첫 지도는 바다 한가운데 외롭게 떠 있는 섬을 공중 높이에서 내려다본 모습이고, 두 번째는 주인공이 짐승과 야만인, 배고픔과 외로움에 포위된 어두운 톤의 지도이며, 세 번째는 농장을 개척하고 성을 축조해 생존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꾼 “성경 속 에덴동산과 유사”한 섬의 모습이다. <모비딕>의 지도로 지은이들은 포경선이 출항한 낸터킷과 광활한 바다를 과감하게 포기하고 “포경선과 고래라는 두 용장에 집중했다.”
<80일 간의 세계일주> 지도에는 증기선과 철도는 물론 돛을 단 썰매와 코끼리 등 당시의 탈것이 사실대로 등장한다. 비채 제공
또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는 “당시의 탈것을 실제 모습대로 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직 비행기가 나타나기 전 장거리 여행의 유력한 두 수단이던 증기선과 철도는 물론 돛을 단 썰매와 코끼리 역시 운송 수단으로 지도에 등장한다.
보르헤스 단편 ‘바벨의 도서관’을 그린 지도. 비채 제공
도서관 형태의 우주를 꿈꾸었던 보르헤스의 단편 ‘바벨의 도서관’ 지도가 특히 흥미롭다. 이 소설의 도서관-우주는 육각형 전시실이 무한히 이어져 있는 구조인데, 각각의 육각형은 사면에 책이 꽂힌 선반이 있고 마주 보는 두 면에는 출입구가 나 있으며 여섯 면 모두에 위아래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이 나 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지만 인간의 척도로는 비좁고 폐쇄공포를 유발”하는 이 도서관-우주의 지도는 무채색에 가까운 색조로 단조롭고 반복적인, 감옥 같은 공간 감각을 극대화했다.
앞서 <소설&지도>가 독자를 대신해 소설 배경을 그려 준다고 했지만, 책의 의도는 독자의 수고 또는 즐거움을 면제시키거나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다. “자기 위치를 확인하기보다는 길을 잃어버리는 게 목표”라는 말처럼, 독자가 책 속 지도에 갇히지 말고 새로운 길을 찾아 자신만의 지도를 작성해 보라는 것이 지은이들의 제언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