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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합리적 의심’ 원칙에 의구심 품은 판사의 선택은?

등록 2019-02-15 06:00수정 2019-02-15 19:55

판사 출신 작가 도진기 ‘합리적 의심’
살인사건 피의자 무죄 판결에 회의
판사 권한 넘어선 행동에 나서는데…
합리적 의심
도진기 지음/비채·1만3800원

현직 판사로 있으면서 추리소설을 활발히 발표해온 도진기 작가가 신작 <합리적 의심>을 내놓았다. ‘신작’이라고는 하지만 작가가 이 소설 초고를 완성한 건 3년 전이었는데 출간을 미뤄오다가 2017년 2월 법복을 벗고 변호사 신분이 되면서 비로소 책으로 낼 수 있게 되었다. 작가는 “판사가 아니었으면 쓰지 못했을 책”이며 “판사였으면 출간하지 못했을 책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도진기 작가는 그동안 주로 추리물에 주력해 왔지만, 이 소설은 스스로 ‘법정소설’이라고 소개했다. 20년 남짓 판사로 봉직한 자신의 경험과 사유를 담은 작품이라는 뜻이겠다. 소설 제목은 ‘의심스러운 때에는 피고인의 이익을 따른다’는 원칙에 따라, 피고인이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존재한다면 판사는 유죄를 선고해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을 가리킨다.

주인공인 현민우 부장판사는 20대 초반 남자가 연상 여자친구와 함께 모텔에 투숙했다가 술에 취한 채 젤리를 먹던 중 기도가 막혀 죽었다고 알려진 ‘젤리 살인사건’을 맡는다. 사건 발생 당시에는 단순 사고사로 처리되었지만, 여자친구 김유선이 거액의 보험금을 수령한데다 죽은 이준호뿐만 아니라 다른 남자들과도 동시에 교제중이었다는 정황이 밝혀지면서 보험금을 노린 살인 혐의로 뒤늦게 기소된 것이다.

소설 속 사건은 2010년 4월에 일어난 이른바 ‘산낙지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삼았다. 남자친구와 함께 모텔에 투숙한 여성이 산낙지를 먹던 중 숨지고 남자친구가 거액의 보험금을 받았다가 역시 살인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사건이다. 대법원까지 가는 재판 끝에 남자친구는 무죄 선고를 받았는데, 소설 속 현민우 판사는 실제 사건 당시 판사들과는 다른 선택을 한다. ‘합리적 의심’ 원칙 자체를 의심과 심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엄격한 증거법칙에 따른 유죄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면 판사 개인의 판단은 양보되어야 한다. 젤리 살인사건. 의심은 농후하나 피고인이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확실히 존재했다. (…) 합리적 의심을 넘어설 수 없는 이상 유죄로 하기엔 장벽이 높았다.”

소설에서도 김유선이 이준호를 죽였다는 정황 증거는 차고 넘치지만, 구체적 물증과 증인이 부족하다. 배석판사 두 명과 합의를 거쳐 판결을 내리게 되는데, 두 배석판사는 김유선의 무죄 쪽에 손을 든다. 2대1. 다수결로 무죄 판결을 내려야 하지만, 최종 판결문을 낭독하면서 현민우는 무죄가 아닌 유죄를 선고한다.

현직 판사로 변호사 ‘고진’이 등장하는 <붉은 집 살인사건> 등의 추리소설을 발표했던 도진기 작가. 2년 전 법복을 벗고 변호사가 된 그의 신작 <합리적 의심>은 재판정과 판사실을 무대로 삼은 법정소설이다. 비채 제공
현직 판사로 변호사 ‘고진’이 등장하는 <붉은 집 살인사건> 등의 추리소설을 발표했던 도진기 작가. 2년 전 법복을 벗고 변호사가 된 그의 신작 <합리적 의심>은 재판정과 판사실을 무대로 삼은 법정소설이다. 비채 제공
<합리적 의심>은 합의의 파기이자 배신이며 ‘위법’이라고 할 수도 있을 판결을 내리기까지 현민우 개인의 고민과 갈등을 통해 ‘합리적 의심’ 원칙에 의문을 제기한다. 소설은 재판정에서 검사와 변호인이 주고받는 공방, 부장판사실에서 합의부 판사들이 벌이는 토론을 박진감 넘치게 묘사한다. 현안인 젤리 살인사건 이외에도 판사들의 일상 업무와 법원 안팎 풍경을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게 그려 보인다. 독자는 쉽게 접근이 어려웠던 법관들의 세계를 엿보고 그들의 고민을 어느정도 이해하게 된다.

“곰탕 국물처럼 뿌옇고 모호한 화법이 난무하는 곳이 법원”, “목에 힘을 잔뜩 준 고집쟁이 같다”는 법원 청사 외관 묘사, 그리고 “판사는 마그마가 꿈틀거리는 거대 단층 위에 200층 빌딩을 지어놓고 사는 직업”이라는 구절 등은 사법 시스템의 한계에 대한 문제의식과 판사라는 직업에 대한 회의를 보여준다.

기존 법질서에서 ‘합리적 의심’ 원칙의 힘은 워낙 막강한 것이어서, 현민우 판사의 1심 판결은 결국 항소심에서 무죄로 뒤집힌다. 그에 좌절하고 분노한 현민우는 판사의 권한과 책임을 넘어서는 행동에 나서고, 그 결과 빚어지는 일련의 사태들은 법정소설의 테두리를 뛰어넘는 스릴과 반전을 가져온다. 법의 역할과 한계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치열하고 진솔한데, 결말부의 거듭되는 반전은 극적 재미에 치중한 나머지 오히려 진지한 사유와 토론을 방해하는 느낌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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