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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코코넛 껍데기에서 뛰쳐나와 연대하라”

등록 2019-02-28 18:47수정 2019-03-02 10:56

경계 너머의 삶-베네딕트 앤더슨 자서전

베네딕트 앤더슨 지음, 손영미 옮김/연암서가·1만7000원

‘상상의 공동체’로 유명한 베네딕트 앤더슨(1936~2015)의 자서전이 나왔다. 타계하기 직전까지 막바지 교정 작업에 힘을 쏟았던 유작이다. 담담하면서도 날카로운 문제의식과 유머를 잃지 않은 자서전의 제목 <경계 너머의 삶>은 그의 실제 삶과 학문 세계를 압축한다.

앤더슨의 어린 시절과 성장기는 ‘이주의 연속’(제1장)이었다. 부친의 직장이 있던 중국 쿤밍에서 태어나, 가계 혈통인 아일랜드에서 초등 교육을 받은 뒤, 영국의 사립명문 이튼 스쿨과 케임브리지대에 장학생으로 입학해 역사와 문학을 공부했다. 특히 학창시절에 “엄청난 분량의 고대 문학을 읽은 경험”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풍요로운 이해와 통찰력을 트여주었다. 이어 미국 코넬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것은 삶의 향방을 가르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여기서 만난 젊은 교수 조지 카힌은 “인도네시아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고 1945~49년에 걸친 반식민주의 무장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온 사람”이었던 것.

당시 인도네시아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지원을 받는 반공·보수 정치가들이 좌파 민족주의 수카르노 정부의 전복을 꾀하던 참이었다. 이런 공작의 성공은 ‘공산주의자’ 딱지를 붙인 자국민 1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대학살로 이어졌다. 이는 앤더슨이 어린 시절 영국에서 목격했던 “계급투쟁과 종교적 갈등, (…) 영국의 인종차별과 제국주의”의 횡포와 맞물리면서 “나중에 마르크시즘과 동양의 반식민 민족주의에 끌린 이유”가 됐다.

앤더슨은 <상상된 공동체>(1983)에서, 근대 국민국가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인 ‘민족’ 개념이 실체가 모호한 근대의 발명품이라고 주장해 학계에 격렬한 논쟁을 촉발했다. 서구에서 ‘민족’이란 “18세기 후반 무렵 창조된 문화적 인공물”이자 “상상된 정치적 공동체”라는 것이다. 앤더슨은 민족성과 민족주의의 기원과 변화 뿐 아니라 “(민족주의가) 오늘날 그토록 심원한 감정적 정당성을 행사하는 이유”에 주목했다.

그러나 ‘상상된 공동체’는 앤더슨의 본디 의도와 달리 가장 많이 오해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모든 민족주의는 악’이라는 식의 해석이 대표적이다. 앤더슨은 자서전에서, ‘상상의 공동체’가 겨눈 세 가지 ‘표적’을 거듭 설명했다. 민족주의가 유럽에서 기원했다는 유럽중심주의, 민족주의의 엄청난 힘에 무지하고 회피한 전통적 마르크시즘과 자유주의, 민족주의를 단순히 어떤 이념으로 폄하하는 시각이 그것이다.

그는 제국의 또다른 형태인 “세계화에 맞선 투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바로 민족주의”라고 말한다. 그러나 “민족주의와 세계화는 둘 다 시야를 좁히고 문제를 단순화할 수 있”으므로 “인간해방을 위한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의 잠재력을 능숙하고 진지하게 섞을 필요성”을 강조한다.

앤더슨이 자서전의 맨 마지막에 인도네시아에서 봤던 경험을 바탕으로 후학들에게 제안한 슬로건은 묵직한 유언으로 남았다.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개구리들이 컴컴한 코코넛 껍데기 속에만 쪼그리고 있으면 절대 이길 수 없으리니. 세계의 개구리들이여, 연대하라.”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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