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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빈집’의 사랑은 희망인가 절망인가

등록 2019-03-08 06:00수정 2019-03-08 20:06

기형도 30주기 심포지엄과 기념 출간
“‘빈집’과 ‘그집 앞’은 연작으로 봐야”
진은영 등 후배들도 헌정 시로 추모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기형도 지음/문학과지성사·1만3000원

어느 푸른 저녁
강성은 외 지음/문학과지성사·1만5000원

기형도(1960~1989)의 시 가운데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지고 크게 사랑받는 것은 아마도 ‘빈집’일 것이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로 시작해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로 끝나는 작품 말이다. 기형도의 시들이 생각보다 쉽지 않고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데 비해 이 시는 사랑의 상실을 비교적 평이하고 감상적인 어조로 노래하고 있다는 점이 대중적 인기의 비결로 꼽힌다.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의 기일에 맞추어 열린 30주기 추모 심포지엄에서 발표자들이 주로 이 시에 논의를 집중한 것은. 그러나 3연 11행짜리 짧은 시임에도 발표자들의 논지가 하나로 모이지는 않았다. 보기에 따라서는 정반대라 해도 좋을 풀이가 맞섰는데, 그만큼 기형도의 시가 풍부한 해석의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다는 뜻이겠다.

7일 오후 기형도의 모교인 연세대 문과대 백주년기념홀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는 네 평론가가 발표를 맡았는데, 이 가운데 세 사람이 ‘빈집’을 주요하게 다루었다. 유성호 한양대 교수는 ‘기형도와 윤동주’라는 발표에서 여러모로 닮은꼴인 두 시인을 비교한다. 비슷한 나이에 요절했으며, 죽은 뒤에야 유일한 시집이 출간되었고, 같은 대학 출신이며, 남다른 대중적 인기를 누린다는 점에서 둘은 닮았다.

기형도 30주기를 맞아 추모 심포지엄과 낭독회가 열리고 후배 시인들의 헌정 시집 등도 나왔다. 7일 저녁 서울 홍대앞에서 열린 낭독회에서 이광호 문학과지성사 대표는 “30년이라는 세월은 기형도라는 이름을 잊게 만들기보다는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기형도 30주기를 맞아 추모 심포지엄과 낭독회가 열리고 후배 시인들의 헌정 시집 등도 나왔다. 7일 저녁 서울 홍대앞에서 열린 낭독회에서 이광호 문학과지성사 대표는 “30년이라는 세월은 기형도라는 이름을 잊게 만들기보다는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유 교수는 ‘빈집’이 기형도가 죽기 얼마 전 <현대시세계> 1989년 봄호에 ‘그집 앞’이라는 시와 함께 발표되었으며 두 작품이 “일종의 연작”이기 때문에 “두 작품을 연결해야 ‘빈집’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로 끝나는 ‘그집 앞’이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의 ‘빈집’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빈집’의 몸통에 해당하는 2연은 “사랑이 이루어지던 때의 기억을 화자가 하나씩 지워가는 과정을 담고 있”으며 3연 두 행은 “마지막 눈물의 글쓰기를 행하고는 그 결과를 서랍에 넣고 잠근 것”이며 따라서 “사랑을 ‘빈집’에 가두어버림으로써 사랑을 영원히 간직하고자 하는 역설적 열망”을 보여준다.

오연경 고려대 교수의 해석도 유 교수와 통한다. ‘나는 쓴다’라는 선언에 이어지는 2연은 “지나간 사건을 텍스트 속으로 띄워 보내는 글쓰기의 의례로 볼 수 있”으며, “3연의 문을 잠그는 행위는 글쓰기의 종료”이고 “이제 빈집에 갇힌 것은 텍스트에 고정된 사랑이다.”

반면 정명교(필명 정과리) 연세대 교수는 ‘사랑의 상처를 글쓰기로 극복한다’는, ‘빈집’에 관한 일반적인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가 보기에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의 ‘쓰다’는 실연을 글쓰기로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잘못된 사랑에 대한 결별 선언이며, 진정한 사랑에 대한 새로운 시도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시도는 다시 절망으로 이어지게 되어,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새롭게 연 사랑의 “문을 잠그”게 된다는 것이 정 교수의 해석이다. 그럼에도 “그의 절망에는 언제나 절망의 재해석을 통한 희망의 샘이 파이고 있었”으며 그것이 “젊은 세대가 앞 다투어 그의 시를 뒤이어 쓰게 된 기형도 신화의 실질적인 비밀”이었을 것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그의 말처럼 90년대 이후 기형도는 후배 시인들에게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30주기를 맞아 기형도 시전집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와 함께 나온 후배들의 헌정 시집 <어느 푸른 저녁>에서 그 영향의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 88명의 시를 담았는데, 제목에서부터 기형도의 시를 떠올리게 하는 ‘지하철 정거장에서의 충고’(진은영)는 그중 하나다. “미안하지만 지하철이 들어오고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천천히 시간의 사다리가 넘어가고/ 나의 종이, 깊은 눈 속에서 깨어났네”로 시작하는 첫 연에서 굵은 글씨체는 물론 기형도의 시구지만, 선배 시인의 목소리는 다른 대목들에서도 들린다. “내 슬픔에 처음으로 이름을 불러준 사람”이 그인데, “길들이 그를 어디로 데려갔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이 하나 있으니, “내 슬픔 이제 서른 살이 되었”다는 사실. 기형도의 죽음 이후 어언 삼십년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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