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메시스와 타자성-감각의 독특한 역사마이클 타우시크 지음, 신은실·최성만 옮김/길·2만8000원
근대화 과정이란 그저 한 방향으로만 향하는 운동이었을까. ‘서양’에서 ‘동양’으로, ‘문명’에서 ‘미개’로 근대성이 확산할 뿐인? 그 반대 방향의 영향은 없었을까? 이질적인 존재들을 만난 이후 ‘나’는 여전히 이전과 같은 ‘나’일까?
마이클 타우시크의 <미메시스와 타자성>은 ‘문명’과 ‘미개’의 ‘첫 접촉’이 이루어진 순간에서 시작해 오늘날 탈식민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자아와 타자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미메시스(모방) 능력이 어떻게 작동해왔는지를 세세하게 추적하는 책이다. 특히 그의 연구는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 베냐민의 미메시스 이론을 발판으로 삼아, 인류학적 현장 연구에 바탕을 둔 민족지들을 활용해 미메시스가 지닌 풍부한 의미층을 드러낸다는 데에서 흥미를 끈다.
타우시크 미국 컬럼비아대학 교수(인류학)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으로 남아메리카 콜롬비아와 볼리비아 등지에서 수행한 현장 연구를 바탕으로 식민주의, 노예제도 등에 관한 독특한 인류학적 사유를 펼쳐온 인류학자다. 특히 베냐민의 글처럼 패러디와 우회, 회귀, 확산하는 독창적인 글쓰기 방식이 읽는 사람의 귀를 쫑긋 세우게 한다.
미메시스란 무엇인가. 그리스 철학으로까지 올라가는 개념사적 전통에 서 있는 미메시스는 산업화 시대에 들어 ‘대상에 종속된 것’이라고 폄하되어왔다. 하지만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도구적 이성이 일으킨 폐해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요구하며 미메시스 능력이 지닌 잠재성에 주목한다.
타우시크는 이런 문제의식을 더욱 심화시켜 미메시스를 문화가 제2의 자연을 만들어내기 위해 이용하는 자연으로서, 복제하고, 모방하고, 모델들을 생산하고, 차이를 만들어내고, 타자를 산출하고,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한다. 미메시스는 단순히 모방하고 흉내 내는 비생산적 활동이 아니라, 주체가 대상과 관계를 맺으며 대상만이 아닌 주체 자신도 변화하고 새롭게 만들어지는 창조적인 활동이라는 것이다.
영국 화가 프랜시스 바로가 1899년 그린 ‘그의 주인의 목소리’에서 개는 속임을 당하지만, 기계의 성능을 보증해주는 역할을 한다. 길출판사 제공
쿠나 인디언들이 여성용 의복에 사용하는 수제 옷감을 ‘몰라’라고 하는데, 레코드 회사인 RCA 빅터사의 로고 ‘그의 주인의 목소리’(His Master’s Voice)는 1950년대 가장 인기 있는 몰라 디자인이었다. 길출판사 제공
스웨덴의 민족학자 에를란드 노르덴시욀드 남작의 사후인 1938년, 남아메리카 파나마와 콜롬비아 중간 지역에 사는 ‘쿠나’ 인디언에 대한 그의 연구가 발표된다. 타우시크의 눈길을 끈 것은 쿠나 인디언들이 치유 주술을 위해 사용하는 목각인형들이 식민통치를 했던 백인 유럽인들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쿠나 인디언이 미메시스가 미메시스된 것의 힘을 공유하거나 그 힘을 빼앗는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문명인’들이 ‘미개인’들을 모방하고 타자화하는 것만이 아니라, 둘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상으로 공존하며, 두 개의 거울 사이에서 미메시스는 곡예를 펼친다는 것이다.
쿠나의 치유인형들. 기예르모 하얀스가 1948년께 그린 그림. 길출판사 제공
사진으로 촬영한 쿠나 치유인형들. 길출판사 제공
미메시스의 흥미로운 점은 점점 누가 누구를 흉내 내는지가 불명확해진다는 데 있다. 1832년, 23살의 찰스 다윈은 비글호를 타고 티에라델푸에고의 원주민들과 만나는 ‘첫 접촉’을 한 때를 기록한다. 다윈은 푸에고 원주민이 “탁월하게 모방했다”고 적었다. 다윈의 일행이 사팔눈을 하고 원숭이 같은 표정을 짓자, 한 젊은 푸에고인은 이를 따라 더 흉측하게 찡그린 표정을 지었다. 비글호의 한 선원은 푸에고인들이 자신을 흉내 내도록 하기 위해 괴상한 춤을 추기도 했다. ‘미개인’과 마주쳤을 때 흉내 내기에 탐닉하고 그것을 자극하는 자신을 인지하지 못하는 ‘문명인’. 둘 중 과연 누가 누구를 흉내 내는 것인지, 무엇이 원본이고 복제인지 결정할 수 있을까? 둘은 마치 원을 그리는 것처럼 자리를 바꿔가며 빙글빙글 돈다. “복제가 원본으로, 그리고 원본이 복제로 전복하는 이 무대. 역사적 초현실의 이 식민지 무대에서보다 이것이 더 드라마틱하게 일어난 곳도 없다.”
이처럼 타우시크는 미메시스를 서구와 비서구, 자아와 타자 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제공하는 창조적인 틀로서 사유한다. 미메시스를 통해 다시 읽어낸 서구와 비서구 사이의 ‘접촉’은 단지 권력이나 문화적 우위로 단순히 설명해낼 수 없는 모방과 유희, 지배와 전복의 끝없는 연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공식적인 식민 지배가 자취를 감춘 20세기 중반부터 접촉은 새 국면으로 접어든다. 거대한 이주와 글로벌 시장, 다국적 기업으로 서구와 나머지 세계, 문명과 타자를 나누는 경계는 이제 세계 전체로 확산하여 종잡을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이런 ‘두 번째 접촉’과 경계의 불안정화로 인해 풀려난 힘을 증명해주는 사실은 바로 “자아가 더는 타자로부터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이제 자아는 타자, 말하자면 자아가 스스로를 정의하기 위해 맞서야만 하는 타자 안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타우시크는 미메시스와 타자성의 수많은 순환을 통해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은 “어떤 거대한 의미의 자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고 말한다.
1993년 이 책의 1판을 출간했던 타우시크는 2015년에 나온 2판 서문에서, 이 책이 현재의 “생태적 대변동 시대”에서 ‘지배하지 않음의 지배’의 전략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한다.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자연지배’라고 부른 것이 현재의 전 지구적 붕괴를 몰고 왔다면, 반대로 그 같은 지배로부터 풀려남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의 절박한 과제다. (…) 이 같은 지배하지 않음의 지배는 언어와 이미지에서 시작하여 나의 몸, 당신의 몸, 그리고 이 세계의 몸에 대한 새로운 방식의 미메시스적 실천을 요구한다.”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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