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다 풀 끗혜 이슬송재학 지음/문학과지성사·9000원
<슬프다 풀 끗혜 이슬>은 송재학의 열번째 시집이다. 1986년 등단 뒤 33년 만이니 꾸준한 속도라 하겠다.
시집 제목은 1935년에 나온 딱지본 <미남자의 루>에 실린 옛 소설의 제목에서 가져왔다. 딱지본이란 지난 시절 화려한 표지에 극적인 이야기를 담아 싼 값에 널리 팔린 국문 소설 책을 가리킨다. 전체 3부로 이루어진 시집의 제3부에는 표제시를 포함해 딱지본 소설을 바탕 삼은 시 열세편이 묶였다. 시인은 유년기에 외가에서 자랐는데, 외할머니가 장에 가면 멍석에 가득 쌓아놓고 팔던 딱지본 책들을 사와서는 이모들에게 읽어달라고 시켰다고 한다. 그렇게 이모들이 책 읽는 모습을 어깨 너머로 보면서 어린 송재학도 글을 깨우쳤다고. 시집 3부의 첫머리에 놓인 시 ‘딱지본 언문 춘향전’에 그 이야기가 고스란하다.
“알록달록한 딱지본 옥중화이다 50년 전부터 할머니였던 외할머니가 금호 장터에서 사 온 1960년대 향민사 춘향전을 이모들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읽어주어야만 했다 책 읽어주는 전기수(傳奇?) 이모의 심사가 사나워지려 하니 외할머니의 조급증이 귀한 계란탕을 내었다 요전법(邀錢法)이다 며칠 지나 외할머니는 오롯이 춘향전의 페이지를 넘겼다 내가 한글을 깨치는 것보다 더 빨리, 글자를 모르는 외할머니가 춘향이 속내를 외우기가 버겁지 않겠다”(‘딱지본 언문 춘향전’ 부분)
열번째 시집 <슬프다 풀 끗혜 이슬>을 낸 송재학 시인. “시를 쓰면서 내가 가장 혜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물과 사람, 생물과 무생물을 향한 범신론적 윤리의식의 확대인 것 같다”고 말했다. 송재학 시인 제공
표제작이 된 딱지본 소설은 청년 시인 진명과 그를 사모하는 여관 접대부 산월의 정사(情死)를 소재로 삼았다. 폐병에 걸린데다 문학적으로도 좌절한 진명이 죽을 결심을 하자 산월이 따라 죽겠다고 나선 것.
“나는 내 생명의 임자가 안이엇구나, 진명은 탄식햇다/ 산월은 진명의 눈빗틀 보고 넘우 가삼이 압흐고 쓰리엇다/ 청명월야 달은 발가셔 두 사람은 져졀로 말갓흔 눈물을 흘다/ 폐병과 가난과 술과 사랑과 죽엄은 오랜 동모 모양 어깨동모 길동모 하면서 본심이 청양하든 청년 시인 진명에게 우슴을 지얏다/ 풀 끗혜 이슬 생기듯 동모가 또 생기는가 보다”(‘슬프다 풀 끗혜 이슬’ 부분)
송재학의 딱지본 시들은 당시 표기를 살려 독특한 효과를 빚어낸다. 이루지 못한 사랑과 그로 인한 죽음, 질투와 음모, 분노와 원한 같은 강렬한 감정을 담은 딱지본 소설들은 흔히 ‘신파’로 폄훼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시인의 손을 거쳐 현대시로 재탄생하는 순간 그야말로 새로운 울림과 흐름으로 질적 변환을 이루는 듯하다. 14일 전화로 만난 시인은 자신의 이런 작업이 “일제강점기 문학에 대한 인식 확대 작업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딱지본 소설의 주 소비층은 학력이 높지 않은 노동자나 농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디테일과 묘사는 제외하고 앙상한 서사만 남게 됐죠. 저는 그렇게 가냘프고 허약한 몸만 남은 딱지본 소설에 나름의 미학을 부여하고 싶었습니다. 일종의 원형 회복을 향한 열망이라고 할까요. 거기에는 친일문학을 포함해서 식민 시기에 대해 제가 지닌 선험적 죄의식도 작용한 셈입니다.”
시인은 딱지본 소설을 시로 다시 쓰는 일은 이 정도로 마무리하고 앞으로는 향가를 가지고 비슷한 작업을 해보고 싶다고 밝혔다.
“수국 곁에 내가 있고 당신이 왔다 당신의 시선은 수국인 채 나에게 왔다 수국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잠깐 숨죽이는 흑백사진이다 당신과 나는 수국의 그늘을 입에 물었다 (…) 한 뼘만큼 살이 닿았는데 꽃잎도 사람도 동공마다 물고기 비늘이 얼비쳤다 같은 공기 같은 물속이다”(‘취산화서’(聚散花序) 부분)
시집 맨앞에 놓인 ‘취산화서’는 이미지 운용의 장인이라 할 송재학의 특징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이 시 말고도 “꽃차례처럼 별이 운다”(‘아직 별의 울음소리는 도착하지 않았다’), “메아리의 울림은 꽃피는 순서와 다를 바 없다”(‘메아리’)에도 꽃차례가 등장하는데, 시인은 “미시적 풍경에 대한 관심에서 꽃차례에 주목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다는 이 글자는 자디잔 가시로 가득하다/ 그 가시들은 뼈의 혼란에서 건져낸 것이다”로 시작하는 ‘참척(慘慽), 4월의 글자’ 역시, 글자 모양에 대한 관찰력과 함께, 작고 낮은 생명에 대한 시인의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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