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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괴팍한 부적응녀 아일린, 성탄절 아침에 집을 나가다

등록 2019-03-22 06:00수정 2019-03-22 20:00

미국 작가 모시페그 데뷔작 ‘아일린’
펜헤밍웨이상 받고 맨부커상 후보에도
혐오스럽지만 사랑스러운 매력 듬뿍
아일린
오테사 모시페그 지음, 민은영 옮김/문학동네·1만4500원

오테사 모시페그(38)는 2015년에 발표한 첫 장편 <아일린>으로 펜/헤밍웨이상을 받고 맨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으며, 10년 주기로 발표되는 <그랜타> 미국 최고의 젊은 작가에 선정(2017년)되는 등 미국 문단의 차세대 주자로 꼽힌다. 그의 출세작인 <아일린>은 1964년 12월 미국 보스턴 외곽 작은 도시 엑스(X)빌에 사는 스물네 살 여성 아일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주인공의 이름을 책 제목으로 삼은 데에서 짐작되듯, 이 소설은 인물의 강렬한 개성에 크게 의지하는 작품이다. 어머니가 죽은 뒤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아일린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비사교적이고 심각한 불행감과 분노, 자기혐오와 망상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거의 모든 것을 혐오했다. 항상 너무나 불행하고 화가 났다. 나 자신을 통제하려고도 해봤지만, 그러면 더 어색해지고 더 불행해지고 더 화가 났다.”

경찰관으로 근무하다 퇴직한 아버지는 술병을 옆에 끼고 살며 환상 속의 적들과 대치 중이고, 아일린 자신은 제대로 씻지도 않으며 몇 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의 옷을 입고 다닌다. “참을 수 있는 한계까지 나 자신의 더러움을 견디는 게 좋았다.” 딸을 술 심부름꾼으로나 부려먹는 아버지는 “얼굴이 그 모양인데 누가 널 건드리겠냐?” “너한테 끔찍한 냄새가 난다”라는 말을 예사로 던지고, 딸은 그 아버지가 사고로 죽기를 바라며 하루하루를 견딘다.

대학을 중퇴하고 민간 청소년 교정시설 하급 직원으로 일하는 아일린은 평생 연인은커녕 친구라고 할 만한 이도 없었을 정도로 괴팍한 외톨이. 직장의 남자 동료 랜디를 짝사랑하며 스토킹하거나 가게에서 초콜릿과 스타킹 따위 작은 물건을 훔치는 것이 그의 드문 즐거움이다.

“물건을 훔칠 때면 천하무적이 된 것만 같았다. 세상을 벌주고 내게 보상을 함으로써 한 번이나마 만사를 바로잡은 양, 정의가 실현된 양 느꼈다.”

그런 그의 앞에 하버드 대학원 출신인 미모의 여성 리베카가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크게 방향을 튼다. 교정시설 교육국장으로 부임한 리베카는 아일린이 보기에 “세상에서 가장 빛나고 가장 우아하고 가장 매력적인 여자”, “매우 총명하고 아름다웠고, 내가 나 자신을 두고 품었던 모든 환상이 구체화한 모습”이었는데, 그가 뜻밖에도 아일린에게 친구처럼 곁을 주며 접근해온 것. 리베카의 출현은 랜디를 향한 짝사랑과 스토킹마저 그만두게 할 정도로 강렬해서, 아일린은 레즈비언이 아님에도 “리베카와 사랑에 빠졌”노라고 토로한다.

2016년 10월24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맨부커상 시상식에 나온 맨부커상 최종 후보 오테사 모시페그. 사진 게티이미지코리아, 문학동네 제공
2016년 10월24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맨부커상 시상식에 나온 맨부커상 최종 후보 오테사 모시페그. 사진 게티이미지코리아, 문학동네 제공
소설은 1964년 12월18일(금요일)부터 성탄절까지 일주일을 배경으로 삼는다. 리베카가 부임한 것은 21일 월요일이었는데, 아일린은 성탄절인 목요일 아침 집을 나섰고 다시는 돌아가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어떻게 사라졌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아일린의 출분이 반드시 리베카 때문이었다고 하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리베카의 출현이 결정적인 작용을 했음은 분명하다. 리베카는 “아주 묘한 순간에, 가장 도망치고 싶었을 때 내 인생에 들어왔다.”

리베카와 함께 난생 처음으로 술집에 가서 남자들의 뜨거운 시선과 관심을 받아 본 것만으로도 아일린에게는 ‘꿈’이자 ‘마법’과도 같은 경험이었다. 하물며 리베카가 크리스마스 이브를 자기 집에서 같이 보내자고 초대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날은 의심의 여지 없이 내 인생에서 가장 흥분되는 날이었다.” 모처럼 큰 돈을 치르고 산 비싼 와인을, 성당 앞 성탄 재현 장식물에서 훔친 예수의 담요로 감싸서는 리베카가 알려준 주소로 찾아가면서 일이 크게 틀어진다. 리베카가 산다는 집은 예상과 달리 낡고 더러웠으며 리베카의 태도는 부자연스럽기만 했다. “모든 게 너무 이상했다.”

아일린을 계획에 없던 가출로 이끈 리베카의 ‘비밀’은 매우 극적인 만큼 돌출적이라는 느낌도 준다. 소설 말미의 깜짝 폭로와 반전은 아일린이라는 인물의 개성과 매력을 희석시키는 듯하다. 이 소설을 읽는 재미는 말미의 영화적 설정보다는 뒤틀렸지만 사랑스러운 아일린의 됨됨이를 보여주는 문장들에서 온다.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남자들보다 내게 더 혐오스러운 건 없다”, “밤에 내 침대는 사랑으로 가득하다. 그 위에 나 혼자 누워 있으므로” 같은 문장들 말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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