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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연필로 쓰고 지우개로 지우니 하루가 갔다

등록 2019-03-29 06:01수정 2022-09-21 14:41

김훈 신작 산문집 ‘연필로 쓰기’
“생활의 질감과 구체성 확보하고자”
노년의 관조 속에 날선 현실비판도
연필로 쓰기

김훈 지음/문학동네·1만5500원

“나는 사람들이 ‘영감’이라고 말할 때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내가 겨우 쓰는 글은 오직 굼벵이 같은 노동의 소산이다.”

새 산문집 <연필로 쓰기>의 한 대목에서 김훈은 자신의 글쓰기가 영감의 소산이 아니라 노동의 결과임을 강조한다. 김훈의 글쓰기 노동을 상징하는 물건이 연필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연필로 쓰기’란 곧 노동으로서의 글쓰기를 가리킨다고 보아도 좋겠다.

전작인 <라면을 끓이며> 이후 3년 반 만에 나온 그의 신작 산문집은 다양한 소재와 주제를 아우른다. 자신의 소설 <칼의 노래>와 <현의 노래>의 주인공 이순신과 우륵을 다룬 글, 역시 자신의 소설인 <남한산성>의 무대를 답사한 글에서부터 세월호와 태극기집회 같은 당대의 현안, 20년째 살고 있는 일산의 풍경과 사람들, 늙는다는 일의 쓸쓸함과 편안함, 최근 붐을 이루는 할머니들의 시 쓰기, 떡볶이와 냉면, 축구, 고래, 똥, 송년회 등 갈피를 잡을 수 없도록 너른 스펙트럼을 보인다. 책에 실린 글 가운데 상당수가 문학동네 인터넷 카페에 ‘누항사-후진 거리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것인데,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하고 진부한 사람 살이를 글감으로 삼았다는 뜻이겠다.

신작 산문집 <연필로 쓰기>를 낸 소설가 김훈이 28일 오전 경기 고양시 일산 집필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신작 산문집 <연필로 쓰기>를 낸 소설가 김훈이 28일 오전 경기 고양시 일산 집필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사람이 살자면 먹어야 하고 먹고 나면 소화되고 남은 것을 몸 밖으로 배출해야 한다는 사실만큼 진부한 진리도 달리 없을 것이다. ‘밥과 똥’이라는 글은 섭생과 배설의 유구한 순환 질서를 다룬다. 특히 작가가 젊은 시절, 사나운 마음으로 과음하고 난 다음날 화장실 변기에 앉아 확인하는 똥의 형태와 냄새를 묘사한 대목이 압권이다.

“똥의 모양새는 남루한데 냄새는 맹렬하다. 사나운 냄새가 길길이 날뛰면서 사람을 찌르고 무서운 확산력으로 퍼져나간다. 간밤 술자리에서 줄곧 피워댔던 담배 냄새까지도 똥냄새에 배어 있다. 간밤에 마구 지껄였던 그 공허한 말들의 파편도 덜 썩은 채로 똥 속에 섞여서 나온다. 똥 속에 말의 쓰레기들이 구더기처럼 끓고 있다.”

“나는 요즘에는 이런 똥을 거의 누지 않는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의 똥은 다소 안정되어갔다”고 그는 덧붙이는데, ‘늙기와 죽기’라는 글에서는 “늙기의 기쁨”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늙음을 수긍하고 찬양한다.

“너무 늦기는 했지만, 나이를 먹으니까 자신을 옥죄던 자의식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나는 흐리멍덩해지고 또 편안해진다. 이것은 늙기의 기쁨이다.”

흐리멍덩해지고 편안해진다고 그는 늙어가는 자신을 묘사하지만, 그것을 안분자족과 현실 안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세월호 침몰 3주기와 4주기를 맞아 <한겨레>에 기고한 글들을 비롯해 용산참사의 역사적 맥락을 헤아린 글, 배달대행 라이더의 실태를 취재해 쓴 글 등을 책에서 만날 수 있다. 김훈은 생명안전시민넷이라는 시민단체의 공동대표를 맡아 삼성전자의 백혈병 논란에 개입하는 등 젊은 시절에 비해 오히려 사회적 관심과 활동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인지, 인터넷 연재 당시 어떤 독자는 김훈이 ‘변모하고 있다’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28일 일산 작업실에서 만난 작가는 “나는 본래 사상 같은 게 없는 사람이고 확철대오와도 무관하다”며 “변화가 있다면 일상의 구체성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에 대해서 쓰려 한 것 때문이 아닐까”라고 말했다.

질감과 색채가 많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젊은 시절이나 지금이나 김훈은 매력적인 산문을 쓰는 작가다. 그의 문장과 문체를 흉내내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글과 나쁜 글은 어떤 것일까.

“일상의 구체성에 바탕한 글, 과장 없이 진솔한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읽은 책을 들이대는 건 졸렬하고 게으른 자들이 하는 짓이죠. 선입견에 갇혀 있는 글도 못 쓴 글이고, 공격 받지 않기 위해 안전장치를 빽빽하게 해 놓은 글은 완전 쓰레기예요.”

신작 산문집 <연필로 쓰기>를 낸 소설가 김훈이 원고지에 연필로 글을 쓰는 모습.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신작 산문집 <연필로 쓰기>를 낸 소설가 김훈이 원고지에 연필로 글을 쓰는 모습.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연필을 쥐고 글을 쓸 때 나는 내 연필이 구석기 사내의 주먹도끼, 대장장이의 망치, 뱃사공의 노를 닮기를 바란다”고 김훈은 책 머리에 썼다. “지우개 가루가 책상 위에 눈처럼 쌓이면 내 하루는 다 지나갔다.” 그렇게 연필로 쓰고 지우개로 지우며 보낸 노동의 날들이 쌓여 <연필로 쓰기>를 이루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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