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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남자 형상으로 강림한 신과 싸우기

등록 2019-04-05 06:01수정 2019-04-05 19:59

천국보다 성스러운
김보영 지음/알마·1만1500원

김보영 작가(사진)의 <천국보다 성스러운>은 에스에프 형식에 담은 페미니즘 우화로 읽힌다.

이야기는 두 축으로 진행된다. 퇴직한 홀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여성 영희의 이야기가 한 축이고, 영희가 잠자리에 들며 상상하는 이야기들이 다른 한 축이다. 영희의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모두 다섯인데, 이 가운데 앞쪽 네 이야기의 허두에는 똑같이 이런 구절이 적혀 있다. 소설의 주제와 연결되는 문장들이다.

“하늘에서 신이 내려왔습니다. 그 신은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영희의 삶은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다. 쉰 살이던 10년 전 퇴직한 아버지가 텔레비전 리모콘을 벗 삼아 시간을 죽이는 동안, 영희는 낮이면 밖에서 일을 해 돈을 벌고 퇴근해서는 아버지의 밥을 차리는 등 집안일을 해야 한다. 아버지는, 가사노동은 여자 몫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 “하루를 온전히 홀로 생존하지 못하는” 그는 딸을 안팎으로 착취하며 구차한 목숨을 이어갈 따름이다.

영희의 머릿속 이야기에는 신이 나온다. 그러나 그 신은 영희 아버지와 다르지 않은 존재. 첫 번째 이야기에서, 지상에 질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신은 “남자는 우수하고 여자는 열등하다”는 가르침으로 ‘고추 지상주의’를 부추긴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200년 만에 냉동상태에서 깨어나, 로봇들만 남은 세상의 신으로 부활한 인간 남자가 역시 영희 아버지를 닮은 ‘뻘짓’을 일삼다가 다시 죽임을 당한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부터는 백인 할아버지 형상으로 광화문에 나타난 신의 강림을 둘러싸고 소동이 벌어지며, 영희의 삶과 머릿속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진다. 알량한 기득권을 움켜쥔 이들은 신의 형상이 자신과 닮았다는 사실에 매달리지만, 주인공 영희와 작가의 생각은 그와 전혀 다르다. “신의 의지는 언제나 신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었다. 그들은 본인 자신이 신이기에 신을 소환하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이 세상에 뿌려진 신의 파편이며 지상에 내려온 신,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 디스토피아적 불안감을 제거한 것 같은 영희의 미래 이야기, 그리고 현실 속 영희의 마지막 결단은 신에 관한 이런 생각을 상상과 실천으로 옮긴 것이라 하겠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김보영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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