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케이비국민은행 자본시장부장 강민혁씨
강민혁 KB국민은행 자본시장부장은 올해 28년 차 은행원이다. 부원은 부장인 그를 포함해 56명이다. 그가 하는 일은 예금·대출과 같은 통상적 은행 업무가 아니다. 달러나 파생 상품을 거래하고 채권을 발행하고 외화를 끌어오는 일을 한다. 연간 채권 운용액이 7조원이란다. 56명이 연간 올리는 순익은 대략 500억원이다. 영업 실적은 하루 단위로 행장에게 올라간다.
말 그대로 ‘자본주의 심장부’에서 일하고 있는 이 은행원이 최근 800쪽 가까운 ‘벽돌’ 철학책을 냈다. <자기배려의 책읽기>(북드라망). 첫 책 <자기배려의 인문학>이 나온 지 5년 만이다. 책엔 저자가 2008년 미친 듯 빠져들어 지금껏 이어온 철학 공부 여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서양 철학자 푸코와 니체, 하이데거부터 중국 철학자 맹자 장자까지 동서고금 철학자들의 사유가 그의 정신에 새긴 흔적을 41개 서평에 풀었다. 철학의 숲으로 이끄는 방대한 참고도서 목록과 해설도 붙였다. 전날 미 워싱턴 출장에서 돌아온 저자를 8일 서울 여의도역 근처 사무실에서 만났다. “워싱턴에서 외화 조달 목적의 투자 설명회가 있었죠.”
그는 2년 전 부장으로 승진했다. 또래보다 빠른 승진이었단다. “1997년 아이엠에프 때 자본시장 업무를 지원해 계속 한 분야에서 일했어요. 오래 하다보니 전문성이 쌓여 인정받은 것 같아요.” 벽돌책 뒤쪽엔 800권가량 되는 참고도서 목록이 있다. 그 가운데 80% 정도는 “이해할 정도로 정독”했단다.
그는 만 38살 때인 2008년 1월 철학에 들어섰다. 은행의 꽤 큰 프로젝트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던 시절이었다. “조직간 이해관계 조율이 힘들더군요. 어느 날 아침 일어나는데 몸이 안 움직였죠. 병원에 가니 술을 더 먹으면 죽는다고 해요. 혈압도 180이 넘었고요. 그전까지 줄담배에 두주불사였거든요. 그때 예전에 <한겨레> 책면에서 본 학습공동체 ‘수유+너머’를 떠올렸죠. 술을 끊기 위해 철학 공부를 시작했어요.”
2008년부터 5년 동안은 미친 듯 맹렬하게 공부했단다. 그 결과가 <자기배려의 인문학>이다. “공부하면서 바로 술·담배를 끊었어요. 평일은 새벽 4시 30분쯤 일어나 출근 전 1시간 책을 봤죠. 출퇴근 지하철과 버스에서 3시간 그리고 퇴근 뒤 2시간가량 독서했죠. 주말 이틀은 새벽부터 자정까지 공부했어요. 지하철 자리가 없어 서서 포스트잇에 메모하며 <천개의 고원>(들뢰즈 가타리 공저)을 읽었어요.” 부장이 되고는 회사에서 차가 나와 출퇴근 독서를 할 수 없는 게 아쉽단다. “지금도 새벽 공부는 하고 있어요. 운전할 때는 녹음기를 틀죠. 생각나는 게 있으면 메모하려고요.”
왜 이런 고행을? “철학 공부가 너무 좋아서죠.” 11년 전 1월을 이렇게 떠올렸다. “처음 수유+너머 연구실에 갔을 때 ‘베냐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읽기’ 강의를 하고 있었죠. 철학책 언어들이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아름다웠죠. 그때까지 저는 철학 개념을 전혀 몰랐어요. 그간 제가 알고 있던 언어들은 ‘힐난하고 비난하고 지시하고 지시받고 책임을 따지고 권리를 내세우는’ 말들이었죠. 연구실에선 전혀 다른 언어들이 오가더군요.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게 일었죠.”
이번 책을 보면 저자가 난해하기 짝이 없는 서양 철학자들의 저술 숲을 자유자재로 유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중년이 되어 시작한 철학 공부의 결과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제주 출신인 그는 고향에서 다닌 대학 시절에도 취업 공부에만 몰두했단다. 그만의 철학 공부법이 있을까? “어려운 니체의 글을 읽다 간혹 이해되는 문장이 나오면 필사했어요. 그리고 그 문장을 바꿔 쓰는 훈련을 했어요. 이걸 휴일이면 도서관에서 종일 했어요. 니체의 문장에 푸코나 들뢰즈 같은 다른 철학자에게서 배운 개념을 끼워 넣어 바꿔 썼죠. 저한테는 쾌락이었어요. 글을 생산한다는 행복감 때문에요.” 이런 독특한 방법을 고안한 계기가 있단다. “공부 모임에서 처음 제 글을 발표하니 중년 남성의 허영과 자랑 위선이 묻어 있다고 비판하더군요. 글이 아니란 거죠. 문장 바꾸기는 글에서 허세를 떨치기 위한 시도였죠.”
그는 ‘함께 공부하기’ 신봉자다. 특히 글을 써 친구 앞에서 발표하는 게 중요하단다. 그가 낸 저술 모두 친구들의 혹독한 비평을 통과했다. “글쓰는 행위 자체가 정치적입니다. 글쓰기는 자신의 아집이나 허영을 드러내고 비판을 받는 행위이죠. 사회생활을 하며 생긴 통념이나 편견은 드러내서 비판받지 않으면 더 강화됩니다. 그 결과는 정치의식의 보수화죠. 비판받고 또 비판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학생운동 경험이 있는 40~50대 중년들이 이걸 잘 못 해요. 비판받으면 기분 나쁘게 생각해요. 공부모임 리더는 그런 장을 마련하고 운영할 줄 알아야죠. 그렇게 해야 합리적 시민의식과 민주의식이 생기죠.”
두주불사·줄담배 ‘죽는다’ 경고에
2008년초 수유+너머에서 공부 시작
최근 800쪽짜리 두번째 철학책 내
“함께 읽기 통한 혹독한 비평 통과” 달러·파생상품·채권 거래 전문
“‘자본’ 통찰로 공동체 기여하고파” 그는 은행원의 철학 공부를 두고 ‘경계의 공부’란 표현을 썼다. 자본주의 심장부인 일터와 자본주의와 맞선 혹은 대결하는 사유가 넘실대는 철학의 영토를 대비해 한 말일 것이다. “철학을 10년쯤 공부하니 제 일을 철학적으로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전엔 철학과 자본시장을 별개라고 봤거든요.” 덧붙였다. “저는 자본이 작동하는 심장부에서 일하면서 반자본적이기도 하고 기타 다양한 존재론적 사유를 하는 철학을 공부하잖아요. 양 시선에서 서로를 바라본 사유를 잘 다듬어 공동체에 기여하는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요. 제가 하는 일이 어떻게 사회경제적으로 조립되어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치는지 더 공부하려고요.”
은행 동료들은 그의 철학 공부를 어떻게 볼까? “세 부류가 있어요. 어렵다는 이들도 있고 관심이 있다는 반응도 있어요. 제 첫 책이 나온 뒤 자극받아 철학 공부를 시작한 회사 동료도 서너 명 됩니다. 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어 안 된다는 이들도 있죠. 제일 안타깝죠. 책 읽고 글을 쓰는 것은 남는 시간에 하는 게 아니라 해야 하므로 시간을 내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직장인들이 자격증 준비를 할 때도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하잖아요.”
책 이름에 쓴 ‘자기배려’는 프랑스 철학자 푸코가 고안한 개념이다. <자기배려의 정치경제학>(가제)을 추가로 펴내 ‘자기배려 3부작’을 완성하겠다는 마음도 있다. 그는 지난 2년 연세대 경제학과 대학원(야간)을 다니며 경제학 공부에 몰두했다.
‘자기배려’에 빠진 이유는? “푸코가 <주체의 해석학>이란 책에서 ‘자기배려’를 ‘단 한 번도 되어본 적이 없는 자기가 되기’라고 했던 표현을 잊을 수 없어요. 기존 위계와 구조 안에서 상승하려는 욕구로부터 비롯된 자기 계발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개념이죠. 기존 위계와 구조를 넘어, 그러니까 경계에 서서 ‘나와 공동체’가 함께 변하는 운동 혹은 윤리와 같은 것이죠. 즉 ‘자기배려’는 ‘나’가 없는 ‘공동체’도 아니고, ‘공동체’가 없는 ‘나’도 아닌 ‘나와 공동체’를 함께 사유하며, 함께 변해가는 정말 박진감 넘치는 개념입니다. 그 뒤 다른 철학서를 읽을 때도 언제나 푸코가 알려준 ‘자기배려’ 개념에 비추어 읽게 되더라고요. 이제는 정치경제학 텍스트조차 이 개념을 중심으로 읽어요. 그러면서 깨달았습니다. ‘자기배려’는 단순히 그리스-로마적 개념이 아니라, 우리들의 정신에 깊이 잠복해 있는 원형적인 것이라는 것을요. 단지 그리스-로마는 ‘자기배려’라고 했고, 동아시아에서는 ‘도’나 ‘인’이라고 했을 뿐이죠. 평생 탐구하고 싶고, 되고 싶은 정신의 원형 같은 것입니다.”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도 푸코다. “푸코는 자기배려라는 개념을 발굴했고 삶도 그렇게 살았어요. 사상적 여정이 굉장히 전투적입니다. 생각과 행동이 막다른 골목에 부닥치면 그걸 돌파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 모습에 제 삶을 투영하죠.”
그는 철학 공부가 주는 놀라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처음 철학자들을 만났을 때 정말 쇼킹했어요. 철학자들의 사유는 보이지 않게 스며들어 사람들의 심층 사유를 바꿉니다. 그 결과로 사람들은 투쟁하게 되죠. 예전에는 구글이 세상을 바꾼다고만 생각했어요. 철학 공부가 저 자신에게 끼친 영향을 관찰하는 것도 흥미로웠고요. 철학 공부는 행운입니다.”
그는 자신이 일하는 자본시장과 공동체의 관련성을 두고 중국 인민대 교수 원톄쥔이 <백 년의 급진>이란 책에서 펼친 주장을 떠올렸다. “원톄쥔이 보기에 옛 소련의 몰락은 이데올로기 붕괴가 아니라 경제를 금융화(화폐화)시키지 않아서죠. 금융화를 통해 글로벌 경제에 대응하지 않았어요. 오랜 기간 실물경제 단계에만 머물러 있었죠. 하지만 중국은 달랐어요. 지금 중국에 큰 은행이 많잖아요. 옛 소련과 달리 글로벌 경제 상황에 적극 대응했어요. 금융 전문지식이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준 한 사례이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강민혁 KB국민은행 자본시장부장. 강성만 선임기자
<자기배려의 책읽기> 표지.
강민혁 부장의 철학 공부 흔적들. 강민혁 부장 제공
2008년초 수유+너머에서 공부 시작
최근 800쪽짜리 두번째 철학책 내
“함께 읽기 통한 혹독한 비평 통과” 달러·파생상품·채권 거래 전문
“‘자본’ 통찰로 공동체 기여하고파” 그는 은행원의 철학 공부를 두고 ‘경계의 공부’란 표현을 썼다. 자본주의 심장부인 일터와 자본주의와 맞선 혹은 대결하는 사유가 넘실대는 철학의 영토를 대비해 한 말일 것이다. “철학을 10년쯤 공부하니 제 일을 철학적으로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전엔 철학과 자본시장을 별개라고 봤거든요.” 덧붙였다. “저는 자본이 작동하는 심장부에서 일하면서 반자본적이기도 하고 기타 다양한 존재론적 사유를 하는 철학을 공부하잖아요. 양 시선에서 서로를 바라본 사유를 잘 다듬어 공동체에 기여하는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요. 제가 하는 일이 어떻게 사회경제적으로 조립되어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치는지 더 공부하려고요.”
강민혁 부장의 서재 출입문 모습. “제가 첫 책을 낸 뒤 당시 초등 4학년이었던 둘째 아들이 써서 붙였어요. 서재 이름이 고철방이 된 이유죠.” 강민혁 부장 제공
강 부장이 큰 아들 논술 공부를 위해 스크랩한 <한겨레> 기사들. 강민혁 부장 제공
연재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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