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아메리칸 드림에 감춰진 ‘백인 쓰레기’ 비극사

등록 2019-04-12 06:00수정 2019-04-12 19:33

알려지지 않은 미국 400년 계급사
낸시 아이젠버그 지음, 강혜정 옮김/살림·3만8000원

‘잉여인간’이란 비아냥은 그나마 점잖은 표현이겠다. ‘백인 쓰레기’ 내지는 ‘인간 폐기물’이라니. 미국 역사학자 낸시 아이젠버그의 <알려지지 않은 미국 400년 계급사>는 문자 그대로 ‘백인 쓰레기’(책의 원제, White Trash)에 주목해, 미국이 누구에게나 평등한 기회의 땅이라는 ‘아메리칸 드림’의 위선과 ‘계급 없는 나라’라는 신화의 허구성을 치밀하게 폭로하는 책이다.

미국에서 ‘백인 쓰레기’는 무례·무지·무능하고 신분 상승의 의지가 없이 반골 기질이 넘치는 골칫덩이 백인 빈곤층을 가리킨다. 앞서 하워드 진이 <미국민중사>(1980)에서 백인 엘리트 집단이 아닌 보통 사람과 사회적 소수자를 역사의 주체로 세웠다면, 아이젠버그는 미국 역사를 통틀어 멸시받고 착취당하고 버려져온 백인 하층민의 연원과 시대별 양태에 주목해 미국판 ‘백인 카스트’의 실체를 드러내보인다.

백인 쓰레기의 역사는 미국이 독립하기 훨씬 전, 영국 식민지 시절인 1500년대부터 시작됐다. 영국은 황량한 신대륙 식민지를 자국의 범죄자·부랑자 등 사회에 위험한 낙오자들의 유폐지로 여겼다. 본토의 계급 차별이 식민지에 그대로 이식됐다. 철저히 소모품 취급을 받으며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장기판의 졸이자, 미국 역사의 맨처음부터 존재해왔음에도 늘 은폐되고 부인돼야 할 국외자들이다. 미국의 주류 지배 집단은 백인 쓰레기들을 추방, 처형, 심지어는 다윈의 ‘적자생존’을 차용한 사회진화론과 우생학 논리에 따라 단종시켜야 할 폐기물로 취급해 왔다.

‘백인 쓰레기’는 식민지 이주 초기 뿐 아니라 신생국 독립, 남북전쟁, 국가 재건, 대공황, 경제 부흥기, 그리고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우뚝 선 21세기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재생산된다. 지은이는 “‘싫든 좋든, 그들은 우리이며 항상 우리 역사의 본질적인 일부”였으며 “21세기에도 백인 쓰레기는 가망 없는 망나니라는 오랜 고정관념에 그대로 노출돼 있다”고 짚는다. 금수저이자 부동산 재벌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주요 지지층이 바로 이들이란 사실은 얼핏 역설 같지만, 이 책을 보고 난 뒤엔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갈수록 능력주의 신화로 족벌세습의 진실을 가리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우화로 읽히는 까닭이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