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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가혹한 삶… 연민과 애도, 그리고 복수의 이야기

등록 2019-04-26 06:01수정 2019-04-26 19:59

권여선 신작 장편 ‘레몬’ 출간
고3때 숨진 언니의 살해범은 누구?
신의 섭리 부정하고 개인적 복수 감행
레몬
권여선 지음/창비·1만3000원

“어떤 삶은 이유 없이 가혹한데, 그 속에서 우리는 가련한 벌레처럼 가혹한 줄도 모르고 살아간다.”

권여선의 신작 장편 <레몬>에서 주인공 다언은 자신이 목격한 ‘어떤 삶’을 보며 이런 상념을 곱씹는다. 그가 목격한 가혹한 삶의 주인은 한만우와 여동생 선우 그리고 그들의 난쟁이 어머니로 이루어진 일가족. 만우는 고교 졸업반이던 2002년 7월1일 둔기에 머리를 맞아 숨진 다언 언니 해언의 살해 용의자로 수사를 받았던, 해언의 고교 동창이다. 그는 무죄로 풀려났지만, 그 뒤 군 복무 중 발병한 무릎암을 제때 치료하지 못해 왼쪽 무릎을 절단해야 했다.

고교 시절 그가 아르바이트를 했던 치킨집 사장의 말처럼 한만우는 일머리가 좋고 성실하며 책임감이 강한 청년이었다. 다언의 위와 같은 관찰 이후에 그는 세탁공장에서 일하다가 화상을 입고, 결국 육종이 폐에 퍼져 나이 서른에 삶을 접는다. 소설 앞부분에서 다언은 “어떤 삶에도 특별한 의미 같은 건 없다” “무턱대고 시작되었다 무턱대고 끝나는 게 삶”이라는 생각을 펼치기도 하는데, 한만우의 삶이 대표적이다.

다언이 보기에 무턱대고 시작되었다가 무턱대고 끝나 버린 것은 한만우의 삶만이 아니다. 언니 해언의 삶 역시 그러하다.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비명횡사한 언니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절대적이고 압도적인 아름다움”의 소유자였다. 다언이 사건 발생 뒤 8년이 지나서 새삼스럽게 한만우를 찾게 된 것은 미제 사건으로 남은 언니의 죽음의 비밀을 찾고자 해서였거니와, 소설 <레몬>은 다언이 언니의 살해범을 추적하고 충격적인 방식으로 그에 복수를 한다는 점에서 ‘장르적’ 요소를 지녔다.

소설 <레몬>의 작가 권여선은 ‘작가의 말’에서 “삶이 결코 평범하지도, 평화롭지도, 평온할 수도 없다는 사실은, 늘 당연하면서 놀랍고, 이상하면서 또 궁금하고, 두려우면서 매혹적이어서, 우리는 자꾸 삶의 이야기를 듣고 읽고 쓰는 것일까, 생각합니다”라고 썼다. 정용일 <한겨레21> 기자 yongil@hani.co.kr
소설 <레몬>의 작가 권여선은 ‘작가의 말’에서 “삶이 결코 평범하지도, 평화롭지도, 평온할 수도 없다는 사실은, 늘 당연하면서 놀랍고, 이상하면서 또 궁금하고, 두려우면서 매혹적이어서, 우리는 자꾸 삶의 이야기를 듣고 읽고 쓰는 것일까, 생각합니다”라고 썼다. 정용일 <한겨레21> 기자 yongil@hani.co.kr
해언의 미모를 일러 다언은 “내용 없는 텅 빈 형식의 완전함”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김종삼의 시세계를 가리키는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라는 말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이는 말하자면 해언이 백치미의 소유자라는 뜻에 가깝다. 해언은 자신의 빼어난 외모를 특별히 의식하지도 않고 그 미모를 가지고 무언가를 꾀하지도 않는다. “언니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무턱대고 시작되었다가 무턱대고 끝났다는 점에서 해언과 한만우의 삶을 동급에 놓는 다언의 무의식에는 두 사람이 ‘무구한 희생자’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처음에 다언은 한만우에게 어느 정도 혐의를 두고 접근했지만, 그가 견디는 가혹한 삶을 목격하며 생각이 바뀐다. 또 다른 유력 용의자였던, 부유한 동급생 신정준 쪽으로 표적을 바꾼 것. 소설 앞부분에서 다언은 형사가 한만우를 취조하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는데, 두 용의자의 계급적 차이 때문에 형사가 신정준보다 한만우에게 더 혐의를 두고 수사했을 것으로 짐작하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한만우의 죽음을 경유함으로써 나는 비로소 언니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게 되었다”고 다언이 말할 때, 거기에는 한만우와의 계급적 동질감과 연대의식이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망루가 불타고 배가 침몰해도, 이 모두가 신의 섭리다,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신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소설 후반부에서 다언은 고교 문예반 선배이자 해언의 동급생이기도 했던 상희를 오랜만에 만나 이렇게 묻는다. 이 질문에는 신과 종교에 대한 회의와 함께, 용산 참사와 세월호 침몰 같은 사회적 아픔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 사건들의 정치적·계급적 맥락을 겨냥한 항의의 뜻이 담겼다. <레몬>이 단순한 개인적 복수담이 아니라 삶과 죽음에 대한 존재론적 탐구이자 사회·경제적 차별 구조를 향한 고발로도 읽히는 것이 그 때문이다.

<레몬>은 2016년 계간 <창작과비평>에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중편을 수정·보완한 작품이다. 성경 누가복음 23장 34절 “(저들은)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를 비튼 이 제목은 현실의 죄악과 부조리의 책임이 절대자에게 있음을 강력하게 환기시킨다. 다언이 상희에게 따지듯 던진 질문과 통하는 제목이라 하겠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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