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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괴짜 과학자의 문명 탈출 실패기

등록 2019-04-26 06:01수정 2019-04-26 19:54

유토피아 실험
딜런 에번스 지음, 나현영 옮김/쌤앤파커스·1만6000원

이 책은 ‘이토록 엉망진창인 실험은 지금까지 없었다!’고 내세운다. 역발상 마케팅인가 싶은데 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벌였던 실험이 엉망진창인 건 확실해 보인다. 물론 철학박사이자 로봇공학자로 성실한 연구자였던 저자가 작정하고 ‘파국의 롤러코스터’를 탔을 리는 없다. 그는 지구 온난화와 식량 부족, 환경오염과 에너지 위기, 문명의 타락 등을 우려했을 뿐이다. 그런데 파국은 왜 인류가 아니라 그 자신에게만 온 걸까.

<유토피아 실험>은 홍보문구만큼이나 기괴한 자기고백서이다. 책의 들머리에서 정신병원에 입원한 저자가 그곳에 오기까지 1년여간 벌였던 자신의 ‘유토피아 실험’ 과정을 복기한다. 2005년 그는 멕시코에 갔다가 마야 문명 유적지에서 “마야의 붕괴와 현재 우리 지구가 봉착한 난관이 아주 유사함”을 문득 깨닫는다. 지금의 문명도 마야와 같은 파국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고, 파국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실험에 나서기로 한다. 그는 문명의 이기와 단절해 자급자족하는 삶을 기획하고 동참할 사람들을 모은다.

그런데 여기서 ‘유너바머’의 선언문이 끼어든다. 그는 기계문명의 발전이 지구를 파멸시킬 것이라는 종말론자의 선언에 빠졌다. 물론 테러로 문명의 붕괴를 앞당겨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유너바머와 같은 결론, “문명이 붕괴해 인류가 산업화 이전의 과거로 돌아갈 날”에 이르렀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다. 그는 이미 약간 ‘미친’ 상태에서 모든 걸 시작한 것이다. 스코틀랜드 벌판에서 진행될 1년여의 실험을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집을 파는 등 “다리를 불태우고” 런던 중심가에 사는 동생에게 “석유가 바닥났을 때 (자신의 피난처로 합류할 수 있도록) 교통수단으로 말 한 마리 사라고 재촉”하는 저자의 행동에서 이미 실험은 실패의 기운을 내뿜는다.

농사라고는 “호기심으로 기른 대마초가 전부”였던 그의 실천은 더 엉망일 수밖에. 아마추어인 동료들과 벌판에 몽골식 이동주택인 유르트를 세우고 시작한 자급적 삶은 힘들고 더러운 건 둘째 치고 애초 불가능했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인근 슈퍼마켓에 가면서 “전 지구가 파국을 맞은 직후 인근 가정집이나 상점에서 저장품을 뒤지고 다닐 수 있다는 논리” 등을 얼기설기 세우다가 그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극심한 우울증에 빠진다.

그래서 결론에서 이 모든 걸 후회하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1만년 뒤든, 1억년 뒤든 다가울 파국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이 근본적인 사실과 대면하게 되면 (…) 정신이 잠깐 나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평온을 되찾아 (…) 이 짧고 고되고 아름다운 삶이 우리에게 남긴 작은 선물을 음미할 수 있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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