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라 슈만 평전 낸시 B. 라이히 지음, 강자연·하인혜 옮김/경북대학교출판부·2만9000원
지금이라면 마르타 아르헤리치급이었을까. 그는 “제왕적 풍모”를 가진 여성 피아니스트였다. 범접하기 힘든 아우라와 위엄을 지녀 슈만, 브람스, 리스트 같은 작곡가들이 ‘여사제’라고 일컬을 정도였다. 자신의 연주료를 당당히 요구했으며 남성 음악가들과 동등한 위치를 원했다. 남편을 좋게 본 음악감독이라도 자신을 무시했다 싶으면 “내 연주는 남편과 별개”라며 화를 냈다.
하노버에서, 15살의 클라라 비크. 피아노 위에 그의 협주곡 7번 3악장의 솔로 파트가 펼쳐져 있다. J. 기에르의 1835년 석판화. 츠비카우의 로버트 슈만 하우스 소장. 경북대학교출판부 제공
클라라 슈만(1819~1896) 탄생 200년에 맞춰 제대로 된 평전이 나왔다. <클라라 슈만 평전>은 미국 음악학자 낸시 라이히의 책 <클라라 슈만: 더 아티스트 앤 더 우먼>(1985)의 2001년 개정판을 번역한 것이다. 미국에서 첫 출간된 뒤 풍부한 자료조사와 드라마틱한 재현으로 학술적 가치까지 인정받은 책이다.
클라라 슈만은 19세기 낭만주의 음악사와 피아니즘에 강한 흔적을 남긴 여성 음악가로 최근 재평가되고 있다. 단순히 로버트 슈만의 아내라거나 요하네스 브람스가 흠모한 여인으로 기억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곱 아이의 어머니였던 그는 1854년 남편이 죽을 때까지 거의 계속 임신 상태였지만 그 14년 동안 무려 139번이나 연주회를 치렀다. 죽는 날까지 연주 레퍼토리를 확장했고 남편과 자식들의 죽음 같은 연이은 비극적 사건 속에서도 예술 활동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던 “불굴의 생존자”였다.
12살의 클라라 비크(파리). 에두아르드 페흐너의 초상화에 기반한 1832년 목판화. 츠비카우 로버트 슈만 하우스 소장. 경북대학교출판부 제공
그는 1828년 아홉 살 때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첫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는 야심가였고 ‘바짓바람’을 일으키며 신동의 연주여행을 따라다녔다. 어린 클라라는 사람들 앞에서 “우수에 젖은, 조롱하는 듯 고통에 찬” 미소를 가끔 지었다는데, 폭군에 독재자였던 아버지 탓으로 짐작된다. 그럼에도 연주 활동은 승승장구했다. 왕족이나 남성 작곡가들은 그를 추앙했고, 출판업자들은 앞다퉈 클라라가 만든 곡을 출판하려 애썼다. 괴테는 클라라가 10대 시절 이미 “남자아이 여섯 명이 치는 것만큼의 힘을 갖고 연주한다”고 평했으며, 동료 음악인들도 “음악에 있어서 충분히 남성적”이라 말했다.
딸의 연애를 반대해 슈만을 고소한 아버지와는 20살에 결별했다. 아버지가 결혼 지참금을 주지 않자 클라라는 연주여행으로 돈을 벌었다. 로버트 슈만은 다정한 남편이었음에도 정신적으로 불안했다. 클라라는 남편 작품의 리허설을 감독했고, 피아노 편곡을 거들었으며 남편의 피아노곡들을 초연하면서 널리 알렸다. 청년 브람스는 클라라를 격정적으로 사랑하며 슈만가를 돌봤는데, 나이가 들수록 뒤로 물러섰다. 무자비할 정도로 이성으로서 관계를 끊어내 클라라가 상처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클라라가 죽을 때까지 우정을 지켰으며 평생 독신이었다. 그는 클라라가 죽고 열달 뒤 세상을 떠났다.
결혼 직전인 스무 살의 클라라 비크 초상. 이즈음 그는 돈을 주지 않는 아버지에 맞서 연주회를 통해 자신의 지참금을 벌기로 결심했다. 요한 하인리히 슈람의 1840년 채색 소묘. 츠비카우의 로버트 슈만 하우스 소장. 경북대학교출판부 제공
클라라 슈만에 대한 관심이 폭증하고 그의 악보가 복원된 것이 20세기 페미니즘의 영향이라지만, 지은이는 클라라 슈만이 페미니스트가 아닌 프로 연주자로서 스스로를 정의했다고 강조한다. 여성 권리 투쟁에 동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공을 확신했고, 아내나 어머니 노릇보다는 전문 연주자로서 느낀 성취감이 큰 사람이었다는 얘기다. 그는 아마추어에 머물렀던 당시 ‘신동 출신’의 다른 여성 연주자들과 달리 프로 연주자로서 남자들과 경쟁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비엔나에서의 클라라와 로버트 슈만. 1847년 에두아르드 카이저의 석판화. 츠비카우의 로버트 슈만 하우스 소장. 경북대학교출판부 제공
그의 삶이 워낙 중층적이어선지, 공동번역자인 피아니스트 강자연 숙명여대 대학원 반주과 대우교수와 영문학자 하인혜 인천대 영어영문학과 조교수조차 역자후기에서 각자 다른 입장을 밝혔다. 하 교수는 1980~90년대 이후 백인 남성 중심의 문학사 속에 잊힌 여성작가들의 작품을 발굴하는 페미니즘 문학연구자들의 ‘리커버리 프로젝트’와 최근 대두되는 여성주의적 의제를 연결해 평전의 의의를 살렸다. 강 교수는 음악적 특권이나 보호막이 없는 가운데 출산과 양육, 생계 유지를 수행해나가는 과정에서 정련된 음악을 탄생시킨 한 19세기 여성 전문 연주자의 치열한 투쟁에 방점을 찍었다. 어느 쪽이든 엄격한 자기 단련과 맹렬한 투지로 예술적 성취를 이룬 19세기 여성 음악 거장에게 바치는 헌사로 읽힌다.
서른다섯 살의 클라라 슈만. 로버트 슈만이 병원에 수용된 직후, 프란츠 한프슈탱을이 1854년 찍은 사진. 츠비카우의 로버트 슈만 하우스 소장. 경북대학교출판부 제공
책은 클라라 슈만의 작품들에 대한 정보를 포함해 700쪽에 달한다. 음악학 연구에서 쓰이는 방법론적·심리학적 통찰, 여성사, 음악사를 통괄하며 평전으로서 품격을 갖췄다. 클라라가 슈만, 브람스를 비롯해 동료들과 주고받은 편지, 일기도 감정선이 살아있어 읽는 재미를 더한다.
59살의 클라라 슈만. 프란츠 폰 렌바흐의 파스텔 초상화. 1878년. 츠비카우의 로버트 슈만 하우스 소장. 경북대학교출판부 제공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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