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배씨는 주업이 출판이지만 강연도 종종 한다. “북 메이킹과 가상 공간 만들기를 주제로 강연을 합니다. 요즘은 뜸한 편이죠. 수입은 직장 다닐 때 정도는 됩니다. 먹고 살만 합니다.” 그가 새로 이름을 붙인 한국 괴물 중엔 천타충, 유인수 등이 있다. “기존 괴물 이름과 이질감이 들지 않게 하느라 고민을 많이 했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독립출판인 고성배씨는 지난 5년간 잡지 8권과 책 12권을 냈다. 한 권 내는 데 딱 두 달만 공력을 들인다. 그만의 철칙이다. 대신 이 기간에는 잠자고 밥 먹는 시간만 빼고 출간 작업에 힘을 쏟는다. 글은 물론 삽화나 디자인, 편집까지 모두 그가 한다. 가볍게 읽히는 책이 목표라 두 달이 지나면 미련 없이 손을 턴단다.
20권 중 딱 1권을 제외하곤 시중 구매가 힘들다. 독립출판물인 데다 대부분 다 팔려나가서다. 기성 출판사에서 나온 유일한 책 <한국요괴도감>(위즈덤하우스)은 출간 한 달 만에 최근 재판을 찍었다. 고씨를 지난 30일 홍익대에서 만났다.
<한국요괴도감>은 고씨가 크라우드펀딩으로 1억원(8천여 명)을 모아 지난해 7월 낸 <동이귀괴물집>을 다시 낸 책이다. 그가 작년 11월에 낸 <검은 사전>도 크라우드펀딩을 해 비슷한 금액을 모았다. 최근 펀딩을 마친 <괴초록>(미발간)은 4천만원을 확보했다. 1년 새 책 세 권의 제작비로 2억4천만원을 모은 것이다. “독립 출판물 크라우드펀딩으로는 최대 액수라더군요.”
<한국요괴도감>은 우리 고문헌과 민담에 나오는 괴물과 귀물을 모아 정리한 책이다. 책에 실린 요괴 200여 종 가운데 3분의 1은 그가 직접 이름까지 지었다. 삽화도 다 직접 그렸다. “한국 요괴를 책으로 모은 건 처음이죠. 그간 한국 괴물로는 구미호, 처녀 귀신, 도깨비 정도만 알려졌거든요. 한국에도 이런 괴물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가벼운 책을 쓰고 싶었어요. 이 책을 활용해 완성도가 높은 도감이나 혹은 소설이나 드라마, 보드게임 같은 콘텐츠가 나오면 좋겠어요.”
고성배씨가 <한국요괴도감>(위즈덤하우스)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검은 사전>은 전 세계의 악한 존재들을 종교와 신화, 전설별로 정리했고 <괴초록>은 우리 고문헌 속 신기한 나무들을 정리할 계획이다. “괴초록은 아무래도 <동의보감>을 많이 참고할 것 같아요.”
크라우드펀딩 출판은 재작년부터 했단다. “모두 8차례 시도했죠. 나머지 5권은 2천만원에서 200만원까지 모았어요.”
시중 거래가 되지 않는 독립 출판물 <동이귀괴물집>이 기성 출판사에서 나오게 된 데는 배경이 있단다. “제 책이 인터넷에서 15만원까지 거래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열심히 만든 콘텐츠인데 더 많은 사람이 보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더군요. 마침 출판사에서 연락도 왔고요.” 요괴 하나마다 대체로 두 쪽을 할애했다. 한쪽엔 요괴 삽화와 특성을 요약한 총평을 담고 다른 쪽에는 요괴가 등장하는 고문헌이나 민담 텍스트를 실었다.
고성배 덕집장이 만든 잡지 <더쿠> 표지. 강성만 선임기자
<더쿠> ‘서울 미스터리 가이드 북’ 중에서.
그는 자칭 ‘덕집장’이다. 덕후+편집장의 준말이다. 2014년 4월 직장에 다닐 때 그가 첫 호를 낸 잡지 이름도 <더쿠 THE KOOH>다. ‘본격 덕질 장려 잡지’라고 선전했다. 8호까지 나온 <더쿠>는 호마다 혼자 놀기, 집착, 공상, 배회와 같은 ‘덕후스러운 습성’을 파고들었다. 잡지 말고도 두 개의 출판 프로젝트를 따로 하고 있다. 하나는 <한국요괴도감> 같은 단행본 시리즈이고 또 하나는 잊히는 것들을 기억하는 시리즈인 ‘닷 텍스트(.text)’ 레이블 출판이다. 두 시리즈를 지금껏 각각 6권씩 냈다.
덕후냔 질문에 그는 바로 ‘머리를 가로젓는 퍼포먼스’를 했다. “사실 모든 사람이 다 덕후이죠. 좋아하는 게 있으면 그게 덕후입니다. 누구나 다 음식이든 뭐든 뭔가 좋아하는 기질이 있어요. 그런데 덕후라면 왠지 부정적인 어감이 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덕후냔 질문에 늘 고개를 저어요. 퍼포먼스죠.”
질문을 바꿔 뭘 좋아하는지 물었다. “옛것들, 그중에서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들을 비정상적으로 좋아하는 느낌이 있어요. 요괴도 그렇고요. 에스에프 영화가 처음 나온 1895년부터 1948년까지 에스에프 영화 속 기계장치를 모아 책을 내기도 했죠. ‘서울 미스터리 가이드’란 제목의 잡지에는 서울의 사라져 가는 공간을 모았어요. 잡지 디자인도 옛 잡지를 많이 차용합니다. 어설프고 잘못 만들어지는 것들을 좋아해요. 대학 때부터 쓸모없는 것들을 모으는 걸 좋아했어요.” 혼자 놀기가 주제인 <더쿠> 지면에는 덕집장이 버스 정류장에서 집까지 가는 길에 모은 쓰레기에 이름을 붙이며 노는 모습도 나온다.
잊힌 기억이 큰 테마인 닷 텍스트 레이블 중에는 인터넷 경매로 산 1980년대 여중생 일기를 토대로 쓴 책도 있다. “이름 모를 일기장이나 사진을 보면 괜히 뭉클해요. 이 세상을 살았던 사람들이잖아요. 그들의 이야기를 모으는 것도 가치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5년 전 회사 생활을 잘하기 위해 들었던 강의가 독립출판의 길을 걷게 된 전환점이었단다.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그는 2011년 건축 회사에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3년 뒤 네번째 회사에서 마케팅 카피라이터로 일할 때 잡지 만들기 강의를 들었단다. 이를 계기로 <더쿠>가 탄생했다. “잡지를 몇 권 내다 회사와 내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2015년 회사를 나왔죠.”
고성배씨가 그린 한국 요괴 ‘취악’. 고성배씨 제공
가장 좋아하는 한국 요괴는 ‘취악’이란다. “끔찍한 생김새에 악취를 풍긴다고 <어우야담>에 나와요. 이를 토대로 취악이란 이름도 붙이고 큰 날개가 달린 보라색 형상 삽화를 그렸어요. 제가 봐도 잘 그린 것 같아요. 눈이 튀어나오고 코가 오그라들었다는 문헌 내용에 기대어 상상력을 펼쳤죠. 취악은 겁이 많아요. 모습도 재밌고요. 그런 게 좋아요.”
한국 요괴의 특성을 묻자 “괴물치곤 어리숙하다”고 답했다.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요괴가 많지 않아요. 기가 센 사람을 만나면 도망가기도 하고요. ‘야광귀’는 체의 구멍을 세느라 아침이 밝아오는 것도 모르죠. ‘어둑시니’는 사람이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작아지고요. 어설픈데 재밌죠. 생활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하는 친숙함이 한국 요괴의 특성이죠.”
영노처럼 가면극에 등장하는 괴물이나 홍콩할매귀신과 같은 현대 괴물도 나온다. “영노는 양반을 특히 잘 잡아먹는 괴물이죠. 괴물 마니아 사이에서는 꽤 유명해요. 지역이나 극마다 특성이 조금 달라요. 홍콩할매귀신은 현대 괴물이죠. 제가 어렸을 때 유행했어요. (일제 강점기 때) 신문에도 나온 한강 괴물은 봉준호 감독 영화 <괴물>의 모티브였어요.”
‘동이귀괴물집’ 등 3권 출간 비용으로
1년 새 2억 4천만원 크라우드펀딩
‘독립출판 펀딩으로 최대 액수’
‘가벼운 책’ 의도 … 두 달 이내 ‘뚝딱’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옛것 좋아
한국 괴물 특성은 어리숙하고 친숙”
그의 책에 기꺼이 호주머니를 여는 이들은 누굴까? “원래 귀신에게 흥미가 있는 분들도 있고 제가 모은 요괴를 캐릭터 만들기에 활용할 생각이 있는 소설가나 만화가들도 있고요. 출간 뒤에 책의 귀신들을 활용해 만화 스토리를 만들어 한 부 보내준 분도 있어요. 많이 뿌듯했어요. 인스타그램에 제 삽화를 재구성해 매일 올리는 분들도 있고요. 어머니들한테도 책을 구할 수 있냐는 연락을 많이 받아요. 아이들한테 보여주고 싶다고요.”
고성배씨가 그린 한국 괴물 ‘불가사리’. 고성배씨 제공
독립출판인으로 자리를 잡은 비결이 뭐냐고 묻자 그는 “꾸준함”이라고 했다. “힘들어 포기하려고 했던 적도 있었죠. 재작년엔 통장 잔고가 딱 한 달 월세인 40만원만 있기도 했어요. 연락하고 지내는 독립출판 초기 멤버들을 만나면 다들 그래요. ‘꾸준히 하면 된다’고요. 꾸준히 하시는 분들은 다 잘 된 것 같아요. 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 등 여러 이유로 그만두는 분들이 많죠.”
그는 올해 만 35살이다. 여친은 있지만 아직 결혼은 생각하고 있지 않단다. 꿈을 물었다. “꿈은 딱히 없어서…. 하고 싶은 일을 꾸준히 하다 보면 뭐가 되든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해요. 내가 의도하는 건 다 하고 있으니 꿈도 이뤄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출판사를 만들어 다른 작가들 책도 내고 싶어요.”
‘덕집장’이라 좋은 점과 힘든 점은 뭘까?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사는 게 좋죠. 책 만들기 전엔 억지로 해야 하는 일이 있었죠. 회사 다니는 일도 그렇고요. 책도 제가 내고 싶은 책만 냅니다. 회사에 다녔으면 못 봤을 것에 집중하는 시간도 생겼고요. 하지만 구매자나 독자가 많아지면서 부정적인 반응이 생기는 건 힘든 일이죠. 제가 심약한 편이라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아요.”
간혹 발견되는 책의 오류가 도마 위에 오르는 것도 그의 말대로 독자가 늘어난 탓이 클 것이다. “간략히 축약하다 보니 오류가 생긴 것 같아요. 오류를 보고 화낸 분들의 말이 맞아요. 그런데 제 의도가 가볍게 보여주는 것이라 시간을 더 들였더라도 오류는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요괴 책 집필을 위한 자료 수집은 어떻게?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는 포털에 번역 자료가 있더라고요. <한국구비문학대계>는 필요한 대목마다 국립중앙도서관 자료 신청 서비스를 이용했어요. <성호사설> 등 20여 권 이상은 직접 샀고요.”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콘텐츠를 하나 꼽아달라고 하자 독립출판인 현영석씨가 만든 잡지 <록’셔리>를 언급했다. 록과 럭셔리를 합쳐 잡지 이름을 만들었단다. 럭셔리에 반항한다는 뜻이다. “매우 독특한 분이죠. 우유 팩으로 욕조를 만들고 돌 배수로에서 썰매를 타기도 해요. 건물 사이 좁은 틈에서 생존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죠. 그걸 보면서 이렇게 허물없이 만들어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솔직하게 다 해도 되겠다고요. 나를 노출하려고 할 때 늘 적정선을 고민하잖아요. 생각한 것보다 더 솔직하게 해도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는 무속인 인터뷰집을 내기도 했다. “무속인들을 만나 보니 너무 평범해요. 애 키우는 엄마이고 결혼을 앞둔 아저씨이고 그래요. 어렸을 때 엄마랑 점집에 가서 봤을 때와는 너무 달랐어요.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걸 깨달았죠.” 그 깨달음은 덕집장 고씨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돌아가야 할 것 같다. 그는 고교 때는 대입 준비를 하느라 ‘딴짓’을 할 겨를이 없었고 심지어 대학은 과 수석으로 졸업했단다. 인터뷰 내내 대화 상대자를 배려하는 모습이 남달랐다. 흔히 떠올리는 덕후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