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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산 사람들은 당신의 죽음과 함께 살아야 한다”

등록 2019-05-03 06:00수정 2019-05-03 19:45

미국 장의사 겸 시인의 에세이 출간
죽음은 삶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일부
장례는 애도를 통한 죽음 극복 의식
죽음을 묻는 자, 삶을 묻다-시인 장의사가 마주한 열두 가지 죽음과 삶
토마스 린치 지음, 정영목 옮김/테오리아·1만6000원

“매년 나는 우리 타운 사람들 이백 명을 묻는다. 거기에 추가로 서른 명 정도는 화장터로 데려가 불에 태운다. 나는 관, 지하 납골당, 유골함을 판다. 부업으로 묘석과 비석도 판매한다. 요청이 있으면 꽃도 취급한다.”

강렬하고 인상적인 도입부다. 관형어나 수식어를 배제하고 주어와 술어만으로 이루어진 문장들은 단호하며 엄정한 진실의 효과를 자아낸다.

미국의 시인 겸 장의사 토마스 린치(71)의 책 <죽음을 묻는 자, 삶을 묻다>는 장례지도사로서 경험과 시인의 통찰을 버무려 빚어낸 삶과 죽음에 관한 에세이다. 공동체의 유지·존속에 없어서는 안 될 직업임에도 장의사는 사람들이 가능한 한 접촉을 꺼리는 ‘음침한 직업’으로 간주된다.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아 장의업에 종사하는 린치는 죽음과 주검을 대하는 사람들의 부정적 편견을 깨는 데에서부터 글을 시작한다.

미국의 장의사 겸 시인 토마스 린치는 “죽음이 의미가 없는 곳에서 삶은 의미가 없다”고 최근 번역돼 나온 에세이 <죽음을 묻는 자, 삶을 묻다>에서 썼다. 사진은 중세 흑사병 시대에 죽음을 표현한 판화 중 하나인 <밤의 죽음의 춤>(N?chtlicher Totentanz)(1493). <한겨레> 자료사진
미국의 장의사 겸 시인 토마스 린치는 “죽음이 의미가 없는 곳에서 삶은 의미가 없다”고 최근 번역돼 나온 에세이 <죽음을 묻는 자, 삶을 묻다>에서 썼다. 사진은 중세 흑사병 시대에 죽음을 표현한 판화 중 하나인 <밤의 죽음의 춤>(N?chtlicher Totentanz)(1493). <한겨레> 자료사진
죽음은 흔히 무질서와 결핍을 가리키는 낱말들을 수반한다. “실패, 변칙, 부족, 부전, 정지, 사고” 같은 요인들이 죽음을 초래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그것은 삶을 정상으로, 죽음을 비정상으로 간주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말버릇이다. 삶과 마찬가지로 죽음 역시 세계의 엄연한 일부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린치는 자신의 직업과 결부된 죽음, 죽어감, 슬픔, 사별 같은 것들을, “(생명이나 자유 같은)강건한 명사들의 취약한 하복부”라 표현한다. 마르크스 이론에서 우아한 상부구조를 가능케 하는 하부구조로서 노동의 가치와 필요성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죽음과 관련해 린치가 강조하는 또 다른 측면은, 죽음과 장례는 죽은 사람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산 사람들 몫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은 아무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산 자만이 관심이 있다. 산 사람들은 당신의 죽음과 함께 살아야 한다.”

지은이가 장의사로 일하는 미시간주 밀퍼드의 주민인 거구의 남자 러스 리더는 자신의 장례식에 관한 나름의 계획을 설명하며 장의사가 그 계획을 따라 줄 것을 요구한다. 부인과 자식들을 설득하는 것이 먼저라는 린치의 설명에도 그는 “내 장례식”이고 “내 돈”이라며 고집을 꺾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나는 러스에게 일인칭 단수 소유격 대명사의 ‘형용사적’ 사용과 ‘소유적’ 사용 사이의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를 설명했다.” 장례는 분명 러스의(=형용사) 것이지만, 그 일을 주관하는(=소유) 것은 남은 가족들이라는 말이다.

죽은 이를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다. 남은 이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납득할 만한 형식으로 애도를 함으로써 슬픔을 극복하고 일상에 복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장례의 핵심이라는 설명이다. 미치광이에게 납치되어 강간당한 뒤 야구방망이로 잔인하게 살해당한 소녀의 주검을 밤을 새워 가며 씻기고 봉합해 어머니에게 보인 동료 장의사 웨슬리 라이스의 작업이 훌륭한 사례다.

“몸은 미치광이의 것이 아니라 아이의 것이었다. 웨슬리 라이스는 아이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일으키지도 못했고 분명한 사실을 감추지도 못했지만, 아이의 죽음을 아이를 죽인 자에게서 회수했다.”

시인이 쓴 산문답게 죽음과 장례를 서술하는 시적인 표현들이 독서의 재미를 배가한다. 세탁소 주인 마일로 혼스비의 죽음을 서술하는 이런 문장을 보라.

“마일로는 그 자신의 관념이 되었다. 3인칭과 과거 시제로 영원히 고정되었다. 그의 미망인의 식욕 상실과 수면 장애가 되었다. 우리가 그를 찾는 여러 장소에서 결석자가 되었다. 우리에게서 마일로라는 습관은 사라져, 그는 우리의 환각지(幻覺肢), 우리의 다른 손을 씻기는 한 손이 되었다.”

<죽음을 묻는 자, 삶을 묻다>의 지은이인 미국의 장의사 겸 시인 토마스 린치. 누리집(thomaslynch.com) 갈무리
<죽음을 묻는 자, 삶을 묻다>의 지은이인 미국의 장의사 겸 시인 토마스 린치. 누리집(thomaslynch.com) 갈무리
행사시를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 지은이가 딱 한번 행사시를 쓰게 된 일이 있었다. 타운에서 강을 건너 묘지에 이르는 다리가 무너졌다가 다시 개통되었을 때였다. 강과 다리가 상징하는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와 연결을 노래한 이 시의 마지막은 이러하다.

“강은 지켜야 할 품위 있는 거리,/ 무덤은 산 자와 죽어버린 산 자 사이의 합의/ 죽은 자들의 이름과 날짜들을/ 계속 살아 있게 하겠다는 오랜 합의./ 이 다리는 우리의 일상을 그들과 연결시키고/ 한때 이웃이었던 그들을 다시 이웃으로 만들어준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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