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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나는 증오한다 고로 존재한다

등록 2019-05-10 06:01수정 2019-05-10 19:39

18~20세기 서양 인종주의 기원 탐구
타자 증오·근절하려는 역사철학 추적
인종주의 이데올로그 국내 첫 연구 ‘성과’
“한국의 ‘폭민’과 인종주의 논리 우려 수준”
증오하는 인간의 탄생-인종주의는 역사를 어떻게 해석했는가

나인호 지음/역사비평사·2만5000원

<시온 장로들의 프로토콜(의정서)>은 1900년대 초 악명 높았던 반유대주의 서적이다. 유대인들의 세계 정복 음모론을 담은 이 책은 여러 사람의 손을 탄 위서(僞書)였지만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1863~1947)는 이 책을 바탕으로 한 심화버전 <국제 유대인>을 출간해 세계적으로 유통시켰다. 움베르토 에코는 해당 위서를 소재 삼아 소설 <프라하의 묘지>를 썼는데, 조작에 참여한 자의 내면 상태를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증오한다, 고로 존재한다.”(Odi ergo sum)

나인호 대구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쓴 <증오하는 인간의 탄생>은 유대인 세계지배 음모론을 퍼트린 위서 이야기를 시작으로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 서양에서 나타난 인종사관 및 인종의 역사철학을 다뤘다. ‘인종’ ‘인종주의’란 용어 사용 자체를 경계하는 서구 학계의 입장(거다 러너, <왜 여성사인가>)과 달리 나 교수는 인종주의가 서양에서 발원한 증오의 사상이자 체계화된 이데올로기라고 아예 못박고 심층적으로 담론을 분석해 들어간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독일 화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카울바흐가 제작한 그림 <게르마니아>. 칼과 방패로 무장한 게르마니아는 범게르만주의와 제국주의로 급진화한 독일 민족주의를 상징한다. 역사비평사 제공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독일 화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카울바흐가 제작한 그림 <게르마니아>. 칼과 방패로 무장한 게르마니아는 범게르만주의와 제국주의로 급진화한 독일 민족주의를 상징한다. 역사비평사 제공
<한겨레>와 전화 인터뷰에서 그는 “인종주의의 그 뿌리는 계몽사상에 있고, 서양 주류 철학 사상과 깊게 결부되어 있다. 분석이 너무나 필요함에도 인종주의를 비이성적, 일탈적이라며 회피하는 서양 학계의 경향 탓에 연구가 지나치게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책에서 ‘증오하는 인간’(호모 오디엔스·Homo odiens)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타자를 적대시하고 가공할 만한 증오를 내뿜는 인종주의자들을 가리킨다. 그는 “헤이트(HATE)를 ‘혐오’라기보다는 ‘증오’라고 번역해야 한다”며 “인종주의는 인종우월주의 및 인종차별주의 그 이상”이라고 말했다.

빌헬름 2세가 그린 스케치를 화가이자 카셀 미술아카데미 교수였던 헤르만 크낙푸스가 다듬어 완성한 것이다. 애초 빌헬름 2세의 그림에는 “유럽의 민족들이여, 당신들의 가장 신성한 재산을 지켜라!”라는 문구가 달려 있었다. 이 그림은 황인종의 침략을 형상화했다. 독일인 수호천사인 천사장 미카엘이 가리키는 풍경 뒷면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연기 위로 불타오르는 도시를 바라보는 차가운 눈을 가진 부처의 모습이 보인다. 십자가의 수호를 위해 서로 단결하여 불교, 이교, 야만의 침투에 맞서고 있는 유럽 열강들을 대변하고 있다. 역사비평사 제공
빌헬름 2세가 그린 스케치를 화가이자 카셀 미술아카데미 교수였던 헤르만 크낙푸스가 다듬어 완성한 것이다. 애초 빌헬름 2세의 그림에는 “유럽의 민족들이여, 당신들의 가장 신성한 재산을 지켜라!”라는 문구가 달려 있었다. 이 그림은 황인종의 침략을 형상화했다. 독일인 수호천사인 천사장 미카엘이 가리키는 풍경 뒷면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연기 위로 불타오르는 도시를 바라보는 차가운 눈을 가진 부처의 모습이 보인다. 십자가의 수호를 위해 서로 단결하여 불교, 이교, 야만의 침투에 맞서고 있는 유럽 열강들을 대변하고 있다. 역사비평사 제공
책은 크게 둘로 나뉜다. 18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인종주의의 기원을 역사적으로 탐구하고 인종주의 담론의 경향성을 살피는 부분과, 인종주의자와 이론을 검토한 부분이다. ‘인종주의 이데올로그’들은 특히 흥미로운데, 국내외 선행연구가 부족한 인물들이라 낯선 만큼 눈에 띈다. 먼저, 독일의 계몽주의 사상가 크리스토프 마이너스(1747~1810)는 최초의 근대 인종주의 역사학을 정초한 이다. 그는 백인종 우월주의와 식민주의 정당화를 넘어서서 “아름다움과 못생김”이라는 심미적 기준으로 인종의 위계서열을 만들고 세분화했다. “가장 희고, 혈색 좋고, 우아한 피부”는 게르만 혈통이고, 독일 남부 지방은 “못생긴 외모”를 가졌다는 식이다.

독일 계몽사상의 대변자 크리스토프 마이너스(1747~1810).
독일 계몽사상의 대변자 크리스토프 마이너스(1747~1810).
프랑스의 외교관, 작가, 언론인이었던 아르튀르 고비노(1816~1882)는 지배인종인 아리아인의 퇴화가 인류 역사의 종언을 가져올 것이라며 염세적 인종결정론을 펼쳤다. 그는 나치 독일 인종주의 정치학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게르만족 범신론’을 주창한 루드비히 볼트만(1871~1907)은 독일 국민의 순종교배로 가장 순수하고 진화한 게르만 인종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게르만족 범신론을 주장한 루드비히 볼트만(1871~1907).
게르만족 범신론을 주장한 루드비히 볼트만(1871~1907).

‘게르만 신화’의 유포자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1855~1927).
‘게르만 신화’의 유포자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1855~1927).
독일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를 “신흥종교 교주”로 삼다시피 한,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1855~1927)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게르만 신화’의 유포자였다. 그는 서양 역사철학이 주창한 “인류의 진보” 개념을 부정하고 오로지 “게르만 인종의 발전과 번영”만이 실제 진보라고 보았다. 게르만 인종의 독보적인 우수성을 담은 책 <19세기의 기초>(초판 1889)는 1200쪽에 육박했지만 1915년까지 모두 10만권이 팔려나갔다. 전문학자가 아닌 민족주의적 교양시민들과 젊은 청년들이 대거 그의 책에 열광했고, 광팬 중에는 독일제국 황제 빌헬름 2세도 있었다.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볼트만과 체임벌린에 대한 연구는 이 책의 학술적 성과다.

백인들을 휘감고 있는 몽골인들의 문어발에는 ‘싸구려 노동력’, ‘부도덕’ ‘장티푸스를 퍼트리는 찻주전자’ ‘아편’ ‘뇌물수수’ ‘세관 강도질’ 같은 증오적 표현이 쓰여 있다. 필 메이, ‘문어와 같은 몽골 인종, 오스트레일리아를 움켜쥐다’, , Sydney, 1886. 8. 21. 역사비평사 제공
백인들을 휘감고 있는 몽골인들의 문어발에는 ‘싸구려 노동력’, ‘부도덕’ ‘장티푸스를 퍼트리는 찻주전자’ ‘아편’ ‘뇌물수수’ ‘세관 강도질’ 같은 증오적 표현이 쓰여 있다. 필 메이, ‘문어와 같은 몽골 인종, 오스트레일리아를 움켜쥐다’, , Sydney, 1886. 8. 21. 역사비평사 제공

1940년께 출판된 <시온 장로들의 프로토콜> 프랑스어판의 표지. 유대인 세계 정복 음모론을 퍼트린 매우 강력한 가짜뉴스 매체로 기능했다. 이 판본은 유대인을 날카로운 손톱으로 지구를 움켜쥐어 피를 흘리게 하고, 사람들을 죽이는 악마로 형상화했다. 역사비평사 제공
1940년께 출판된 <시온 장로들의 프로토콜> 프랑스어판의 표지. 유대인 세계 정복 음모론을 퍼트린 매우 강력한 가짜뉴스 매체로 기능했다. 이 판본은 유대인을 날카로운 손톱으로 지구를 움켜쥐어 피를 흘리게 하고, 사람들을 죽이는 악마로 형상화했다. 역사비평사 제공
<시온 장로들의 프로토콜>. 영국의 저널리스트 빅터 마스든이 1923년 러시아어본을 영어로 번역한 판본의 표지다. 영어본 중 이 판본이 가장 많이 읽혔다. 역사비평사 제공
<시온 장로들의 프로토콜>. 영국의 저널리스트 빅터 마스든이 1923년 러시아어본을 영어로 번역한 판본의 표지다. 영어본 중 이 판본이 가장 많이 읽혔다. 역사비평사 제공
19~20세기 제국주의 무한경쟁 시대에 서구 급진적 민족주의자들은 ‘우리는 적들의 세계에 포위되어 있다’는 관념을 유포시켰다. ‘적’은 자국 내 급진주의자, 사회주의자, 여성운동가, 이민자, 유대인 등 다양했다. 중국인의 해외 이주로 촉발된 ‘황화론’은 ‘악마적 인종’을 탄생시킨 대표적 담론이다. ‘매부리코’ 유대인이 유럽 내부의 적이었다면, ‘찢어진 눈’ 황인종은 외부의 적으로 발명되었던 셈이다.

가장 우려스러운 것이 바로 이 시기에 창궐한 ‘국가 인종주의’다. 증오 이데올로기로 발전한 이 위기의식은 인종 개량을 위한 우생학적 청사진 및 제국주의적 팽창 계획과 결합되곤 했다. 나 교수는 “국가 인종주의 시대에 이르면 공동체 구성원 내부의 누구라도 타자화되고 나아가 증오의 대상으로 희생될 수 있다”고 말했다.

더욱 소름끼치는 점은 인종주의가 ‘인종 신비주의’라는 영성, 종교적 형태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율리우스 에볼라(1898~1974)는 오토 바이닝거의 여성혐오사상, 니체의 ‘초인’ 개념 등을 조합한 영적 인종주의를 역설했다. 그는 인종을 육체 단계, 민족혼 단계, 영적 단계로 구분하며 아리아 로마인(이탈리아인)이 본원적 아리아인의 혼과 영을 갖고 있기에 독일인보다 더 우월하다고 보았다. 유사학문적 외피를 쓴 에볼라의 인종서사는 톨킨의 소설 <반지의 제왕> 등과 함께 네오파시즘의 경전이 되었고, 그는 네오파시스트의 ‘구루’로 대접받았다.

한나 아렌트(1906~1975)의 개념인 ‘폭민’은 불만에 가득찬 인종주의 이데올로그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폭민은 전체주의 운동을 지지했던 낙오한 모든 계층의 잉여인간들을 가리킨다. 나 교수는 인종주의 이데올로그들 상당수가 외롭고 우울하고 비사교적인, ‘대타자’에 대한 동경으로 자신을 대신할 환상을 좇았다고 분석했다. 그는 한국 사회에도 국가 효율성을 높이고 인종적으로 엘리트를 만들려는 국가 인종주의적 논리가 침투해 있으며, 극우 집회나 가짜뉴스 등에서 지도자를 신처럼 경배하는 폭민적 정서를 발견한다고 말했다.

<증오하는 인간의 탄생> 지은이 나인호 대구대 역사교육과 교수. 나인호 교수 제공
<증오하는 인간의 탄생> 지은이 나인호 대구대 역사교육과 교수. 나인호 교수 제공
“극우 테리리스트를 영웅시하는 댓글, 이주노동자와 난민 배척, 전라도 혐오의 반유대주의적 언사 등에서 국가 인종주의적 논리를 발견합니다.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환단고기> 추종자들도 저항적 인종주의의 포로라 할 수 있습니다.”

<개념사란 무엇인가>(2011)에서 근대적 ‘여성’ 개념과 타자화를 한 챕터로 검토했던 지은이는 “이번에는 분량 압박으로 젠더를 교차 분석할 수 없었지만 인종주의자들은 예외없이 여성혐오주의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며 “여성 차별과 인종주의는 지적 친화성이 굉장히 강하다”고 말했다. 에코의 소설 <프라하의 묘지>에 나타난 반유대적 인종주의자 또한 여성혐오주의자였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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