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모든 살아 있는 것은 독의 꽃이야”

등록 2019-05-10 06:01수정 2019-05-10 19:47

최수철 장편소설 ‘독의 꽃’
독이 곧 약이라는 ‘파르마콘’ 세계관
독에 관한 지식과 미스터리 성격도
독의 꽃

최수철 지음/작가정신·1만5000원

자크 데리다의 책 <산종>(散種)을 통해 유명해진 그리스어 ‘파르마콘’은 약과 독이라는 상반된 뜻을 아울러 지녔다. 적정한 양이면 독도 약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한의학에서는 상식에 속한다. 있음과 없음, 옳음과 그름, 밝음과 어둠처럼 대립하는 개념들이 사실은 같거나 서로 보완하는 관계라는 주장은 노자 <도덕경>의 고갱이 가운데 하나다.

최수철의 장편 <독의 꽃>은 독이 곧 약이고 약은 다시 독이라는 ‘파르마콘’적 세계관을 소설화했다.

“독이 약이 되고 약이 독이 되는 거야. (…) 이 세상 모든 것은 사랑을 만나면 약이 되고 원한을 만나면 독이 돼.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우리의 하루하루는 독과 약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것이지.”

소설 주인공인 조몽구에게 삼촌인 수호가 하는 이런 말에 이 작품의 주제가 들어 있다. <독의 꽃>은 상한 음식을 먹고 독성 물질에 감염되어 병원에 입원한 화자 ‘나’가 같은 병실에 먼저 입원해 있던 몽구한테서 들은 그의 이야기를 정리해서 전달하는 형식을 취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그렇게 ‘나’와 조몽구의 만남과 헤어짐을 그렸고, 본문에 해당하는 몸체의 세 장이 갖은 독과 약으로 점철된 몽구의 생애를 들려준다는 점에서 일종의 액자소설이라 할 수도 있다.

<독의 꽃>의 작가 최수철.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하나하나가 곧 한 송이 ‘독의 꽃’이요 우리들 하나하나 역시 시 독의 꽃”이라고 ‘작가의 말’에 썼다. 최수철 제공
<독의 꽃>의 작가 최수철.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하나하나가 곧 한 송이 ‘독의 꽃’이요 우리들 하나하나 역시 시 독의 꽃”이라고 ‘작가의 말’에 썼다. 최수철 제공
끔찍한 이마의 두통을 천형처럼 지니고 태어난 몽구는 학교와 군대를 비롯한 집단 생활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대인관계 역시 원활하지 않다. 정권 주변을 맴돌며 기회주의적 언행을 일삼는 ‘어용 문인’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내심 경멸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몽구는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성장기를 보낸다. 한편 독의 세계에 심취해 환경운동가이자 행위예술가이며 생약 관련 민간 연구소를 운영하는 삼촌 수호는 친형인 몽구 아버지 조영로와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지닌 인물로, 몽구를 약과 독의 세계로 이끄는 멘토 구실을 한다.

이런 가족 관계와 함께, 초등학교 시절 동병상련에서 출발해 첫사랑으로 발전한 윤자경, 자경을 둘러싸고 연적의 관계였다가 군대에서는 같은 소대의 고문관으로 재회하게 되는 용한, 역시 군 시절 몽구의 동료였다가 나중에 삼촌 수호의 충복으로 다시 등장하는 신광수, 수호의 연인이자 몽구와도 일시적으로 연인 관계가 되는 문소화, 그리고 몽구가 성장기에 마주쳤던 간호사였다가 나중에 수호네 살림을 돌보는 고영지 등 주변 인물들 역시 몽구가 약과 독의 세계를 헤쳐 가는 과정에서 나름의 역할을 한다.

<독의 꽃>에는 독과 약을 둘러싼 동서고금의 지식과 일화가 차고 넘친다. 십여년 전부터 독에 관한 소설을 구상했다는 작가의 공부를 짐작할 수 있다. 몽구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을 비롯해 자경의 아버지와 오빠 윤정우, 그리고 신광수까지 주요 인물들이 차례로 죽음을 맞고 그 죽음의 배후에 독과 약을 둘러싼 수상쩍은 비밀이 숨어 있다는 점에서 소설은 미스터리의 성격을 지니기도 한다.

“곧바로 그 모든 독들, 삶의 길목 곳곳에서 호시탐탐 노리던 독들이 독침이 되어 그에게로 날아들었다. 그러나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서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처럼 온 힘을 다해 앞으로 나아갔다. (…) 그때 문득 그는 자신이 세상의 모든 독으로부터 공격당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온몸으로 세상 모든 독을 흡수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 중심에 이마가 있었다.”

소설 말미에서 몽구를 괴롭히는 이마의 통증은 예수가 인류를 구원하고자 감내한 시련에 견주어진다. 그가 자경의 상처와 통증을 돌보고 그 대가로 스스로 독에 감염되고 상처를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에 인류애적 대속이라는 거창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보다는 독/약과 삶이라는 이야기의 관계를 포착한 에필로그의 이런 대사가 한결 솔깃하게 다가온다.

“삶이라는 책 한 장 한 장에는 독이 묻어 있어. 네가 손가락에 침을 발라 책장을 모두 넘기고 나면, 그로 인해 중독되고 탈진하여 죽음에 이르게 돼. 그러나 너는 그때 비로소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지. (…) 모든 살아 있는 것은 독의 꽃이야.”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bong@hani.co.kr

<독의 꽃>의 작가 최수철. 최수철 제공
<독의 꽃>의 작가 최수철. 최수철 제공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