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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아이러니의 힘으로 유지되는 관계

등록 2019-05-10 06:02수정 2019-05-10 19:48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
윤고은 지음/문학동네·1만2500원

“붉은 빛깔 선명한 거.”

“핏빛으로.”

윤고은의 단편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에서 9년차 연인인 ‘나’와 선영은 레스토랑에서 메뉴판을 보며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다. 오래된 관계에서 오는 타성과 피로, 오래 만났음에도 선뜻 결혼을 결정하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된 불안과 불만으로 둘 사이에는 모종의 위기감이 감도는 중인데, 그럼에도 “취향은 확실히 비슷”하다고 ‘나’는 속으로 감탄한다. 그런데 사실 둘은 서로 다른 메뉴판을 들고 있었고 한쪽은 와인에 대해, 다른 한쪽은 스테이크에 대해 말한 것이었음이 곧 드러난다.

윤고은 소설집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을 관통하는 특징을 이런 아이러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린 서로 다른 메뉴판을 보고 있었지만 의사소통이 가능했다”고 ‘나’는 이내 상황을 정리하는데, 이 말은 두 사람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여느 관계와 마찬가지로 연인들 사이에서도 크고 작은 오해와 견해 차이는 불가피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관계의 지속과 (결혼으로의) 진전을 방해하지는 못한다는 생각이 이 장면에는 압축되어 있다. 개성과 평양의 아파트 분양 신청이라는 ‘깜찍한’ 발상을 담은 이 소설에서 주인공 커플의 관계는 그렇게 아이러니의 힘으로 유지된다.

소설집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의 작가 윤고은.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소설집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의 작가 윤고은.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단편 ‘오믈렛이 달리는 밤’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이벤트 업체의 팀장인 서른아홉살 독신녀 연경에게 남자 부하 직원인 우준이 문자를 보낸다. “로맨스 푸어? 이팀장이 잘 알지 않을까요?” 다른 이에게 갈 문자가, 더구나 연경 자신에 관한 뒷담화를 담은 내용이 잘못 배달된 것이었는데, 우준의 반응은 오히려 뻔뻔하다. “제가 문자를 잘못 보냈어요. 그런데 그 메시지는 진심입니다.” 이 소설에서도 연경과 우준의 관계는 처음에는 업무의 측면에서, 나중에는 로맨스의 가능성을 둘러싸고 숱한 오해와 아이러니를 발생시키며 앞으로 나아간다. ‘평범해진 처제’에서도 오래 전에 헤어진 커플이 옛 관계를 회복할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오해에서 출발한 것이었음이 밝혀진다.

‘평범해진 처제’에서 두 남녀의 관계 회복은 무망해지지만, 대신 소설가인 화자는 옛 연인과의 만남을 계기로 새 소설 한 편을 쓰게 된다. ‘오믈렛이 달리는 밤’의 결말에서 연경과 우준은 오믈렛을 함께 만드는 행위를 통해 로맨스의 가능성을 확인하고자 하지만, 일이 뜻대로 풀리지만은 않는다. “우준이 프라이팬을 뒤집자 오믈렛이 떨어졌다. 접시 위가 아니라 프라이팬과 접시 사이의 그 애매한 공백으로 툭.”

“애매한 공백”이 또 다른 아이러니를 유발하는 것인데, 다른 작품들에서는 이런 아이러니가 ‘시차’와 ‘잔열’이라는 다른 표현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자신의 장례식을 지켜보는 영혼을 등장시킨 ‘양말들’에서 “몸의 죽음과 마음의 죽음 사이에 어떤 시차”가 있을 수 있다는 가정, 그리고 ‘물의 터널’에 나오는 잔열에 관한 이런 언급을 보라.

“선영은 내 얘기를 듣더니 어떤 순간들은 잔열을 갖고 있어서 물리적 시간보다 더 오래 지속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를 움직이는 건 의외로 아주 큰 에너지가 아니라, 그런 잔열일 수도 있다고 말이다.”

그렇게 아이러니와 시차, 그리고 잔열의 힘으로 관계는 이어지고 세계는 앞으로 나아간다고 윤고은은 믿는 듯하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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