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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여성들이 소설을 읽고 쓴 거대한 상상의 세계

등록 2019-05-17 06:00수정 2019-05-17 19:51

김탁환 소설 ‘대소설의 시대’
18세기 한글소설 창작과 독서 배경
“뒤늦은 박사논문이자 인생의 화해”
대소설의 시대 1, 2
김탁환 지음/민음사·각 권 1만3000원

“인생이 재밌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대학 4학년이던 스물세 살 때 이 책에 소개된 한글 고소설들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때로부터 30년 뒤에 그에 관해 소설을 쓰게 됐으니까요. 연구자 시절 제 전공이 1700년대 한글 소설들이었거든요. 그땐 이 소설들을 읽다가 인생이 다 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도망쳤는데…. 이번 소설은 말하자면 뒤늦게 쓴 박사 논문이자 제 인생에서의 어떤 거대한 화해 같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소설가 김탁환에게 신작 소설 <대소설의 시대>는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듯했다. 이 책은 물론 그가 내고 있는 ‘소설 조선왕조실록’ 연작의 18·19번째 권에 해당하고, 18세기 말 선진적 지식인·문필가 집단인 백탑파의 이야기를 추리적 틀에 담은 백탑파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이기도 하지만, 고전문학 연구자 출신 작가인 그에게는 일종의 ‘귀향’으로서 의미 역시 지니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이 소설을 퇴고한 연희문학창작촌에서 13일 그를 만났다.

<대소설의 시대>는 그가 ‘아름다운 장편소설의 시대’라 명명한 18세기 말을 배경 삼아 여성들의 소설 독서와 창작의 세계를 전면화시킨 작품이다. 두 ‘탐정’ 김진과 이명방이 사건 해결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것은 여느 백탑파 시리즈와 다르지 않지만, 이 소설에서 그들이 다루는 사건의 핵심에는 소설을 읽고 또 쓰는 여성들이 있다. 이 작품의 장 제목은 1장 ‘엄씨효문청행록’에서부터 22장 ‘명주보월빙’까지 22편 소설 제목으로 되어 있는데, 이 소설들은 거의가 여성에 의해 쓰였고 여성 독자들에게 읽혔을 것으로 작가는 추정한다.

여성들이 긴 분량 소설을 쓰고 읽었던 18세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 <대소설의 시대>를 낸 작가 김탁환. “인생에 대해 질문하고 답을 찾는 방법으로 내가 배운 게 소설 쓰기였다”고 말했다. 손홍주 <씨네21> 기자 lightson@cine21.com
여성들이 긴 분량 소설을 쓰고 읽었던 18세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 <대소설의 시대>를 낸 작가 김탁환. “인생에 대해 질문하고 답을 찾는 방법으로 내가 배운 게 소설 쓰기였다”고 말했다. 손홍주 <씨네21> 기자 lightson@cine21.com
조선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일컬어지는 여성 작가 임두는 일차적으로는 궁중의 여인들을 위해 23년째 대소설 <산해인연록>을 써서 매달 혜경궁 홍씨에게 바치고 있다. 그런데 199권까지 잘 써 오던 그가 200권째를 앞두고 몇 달째 진척을 보이지 못하자 궁중에서는 김진과 이명방을 호출해 작가의 상황을 알아볼 것을 지시한다. 특정 시점부터 작품에 오류가 늘었음을 눈치챈 김진은 임두의 치매 증상을 의심하는데, 임두는 소설의 결말을 기록해 둔 수첩 ‘휴탑’을 잃어 버렸음을 실토한다. 두 탐정이 수첩의 행방을 추적하는 사이 이번에는 임두 자신이 정체를 감추고, 사라진 작가를 대신해 그의 두 제자가 <산해인연록>을 이어 써 완결하는 과정에서 휴탑과 임두의 신변을 둘러싼 음모와 비밀이 드러난다.

“<산해인연록>은 물론 임두 작가님이 홀로 23년 동안 쓴 거작이지만, 그 밑바탕엔 이처럼 여자 작가들과 여자 독자들이 백 년 넘게 쌓아온 상상의 세계가 깔려 있다네. 이건 청나라에도 없고 일본에도 없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우리만의 소설이야. 놀랍지 않은가?”

소설 초반부에서 김진이 이명방에게 하는 이런 말에 <대소설의 시대>의 주제가 담겨 있다. “남자 작가가 쓰고 여자 독자가 읽는 구도에서, 여자 작가가 쓰고 여자 독자가 읽는 구도로 바뀌면서, 엄청난 불길이 치솟았다”거나 “비탈을 구르는 눈덩이처럼, 여자 작가들과 여자 독자들이 호응하며 상상의 세계가 갑자기 커진 셈”이라는 말도 마찬가지. 작가는 “개화기 이후 남자 작가들이 계몽과 애국 등의 기치를 들고 등장하면서 소설의 주도권이 남자들에게 넘어갔지만, 실제로는 18세기부터 소설의 주도권을 놓고 남자와 여자가 부딪쳤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백탑파 시리즈의 출발인 2003년작 <방각본 살인사건>에서부터 어언 16년. 백탑파 시리즈는 다섯 작품 열 권, 원고지로는 1만매 분량을 채웠지만, 작가는 여전히 다룰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다고 했다. “김홍도를 비롯한 미술인들, 음악인들, 무술인 등 최소한 다섯 가지 이야기는 더 쓰고 싶은데, 그러자면 다시 16년이 흐르고 저는 일흔 살을 목전에 두게 되지 않을까요? 하하.” 백탑파 시리즈뿐만이 아니다. 50대에는 대하소설을 쓰는 게 원래 계획이었는데,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면서 그와 관련된 책들을 내느라 대하소설은 일단 뒤로 미뤄 놓아야 했다. “미뤘던 대하소설을 쓸지 말지, 지금도 마음이 왔다 갔다 한다”고 그는 말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대소설의 시대>의 작가 김탁환. 손홍주 <씨네21> 기자 lightson@cine21.com
<대소설의 시대>의 작가 김탁환. 손홍주 <씨네21> 기자 lightson@cine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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