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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하는 이나 듣는 이나 ‘꿀잼’인 아무 말 대잔치

등록 2019-05-31 06:00수정 2019-05-31 19:55

최정나 첫 소설집 ‘말 좀 끊지 말아줄래?’
의미없는 대거리와 전염되는 말들
연극적 활기 속에 속물성 비판 담아
말 좀 끊지 말아줄래?
최정나 지음/문학동네·1만3000원

제목이 책의 핵심을 담았달까. <말 좀 끊지 말아줄래?> 신인 작가 최정나의 첫 소설집은 들끓는 말들의 소용돌이와도 같다. 책에 실린 여덟 단편에서 인물들은 끊임없이 말을 하고, 말을 하고, 말을 한다. 그런데 그 말들은 어떤 말인가. 설명이나 주장, 제안이나 감정의 토로 같은 의사소통의 기능을 거의 수행하지 못하는, 무의미한 소음 같은 말들인 경우가 태반이다.

“어차피 사십구 일 동안 구천을 떠돌게 될 텐데 상관없다.”

“죽어봤냐, 사십구 일인지 어떻게 아냐?”

“그러는 너는 죽어봤냐, 구천을 떠도는 걸 어떻게 아냐?”

표제작 ‘말 좀 끊지 말아줄래?’에서 두 주인공 우씨와 이씨가 친구인 조씨의 할아버지인지 아저씨인지의 빈소에서 주고받는 대거리다. 이 대화 직전에, 조화를 나르던 인부 둘이 “쓸데없는 소리 하는군”이라거나 “싱거운 소리 그만하세요”라며 서로를 면박하는 장면도 나오거니와, 우씨와 이씨가 주고받는 말들이야말로 ‘쓸데없’고 ‘싱거운’ 소리라 하겠다. 상주인 조씨까지 합세한 자리에서 우씨는 “역시 아무 말이 하는 거나 듣는 거나 재미는 있다”고 말하는데, 이 말은 언술 행위에 관한 중요한 진실을 담고 있다. 내용의 부실함을 발화 행위 자체에 대한 열정이 덮는다는 게 쓸데없고 싱거운 말들의 특징이겠는데, 책 전체의 제목이 그런 맥락에서 나왔다. 이씨가 한창 발화 행위의 재미에 들려 있는 차에 조씨가 말을 막으며 끼여들자, 참지 못하고 이씨가 한마디 한다. “말하는데 자꾸 말 끊지 말아줄래?”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화가 소설의 몸통을 이루는데 정작 그 대화인즉 별 내용이 없는 ‘소리’에 불과하다면, 이 소설에서 심오한 주제나 교훈을 찾기란 어색한 노릇이다. 그냥 말 자체의 향연을 즐기는 것이 슬기로운 독서 생활일 터.

첫 소설집 <말 좀 끊지 말아 줄래?>를 낸 소설가 최정나. “문학 청년이 아니었기 때문에 소설 독서가 풍부하진 않은데, 소포클레스나 셰익스피어 등의 희곡을 즐겨 읽긴 했다”고 말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첫 소설집 <말 좀 끊지 말아 줄래?>를 낸 소설가 최정나. “문학 청년이 아니었기 때문에 소설 독서가 풍부하진 않은데, 소포클레스나 셰익스피어 등의 희곡을 즐겨 읽긴 했다”고 말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사적 하루’에서 종은은 젊은 나이에 중병에 걸린 친구 수연을 위로하고자 함께 온천에 간다. 야외 온천장에 간 두 사람이 수연의 병을 놓고 걱정스러운 대화를 주고받자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중년 여성들이 릴레이 경주의 바통을 넘겨받듯 화제를 이어 간다. 건강식과 건강보조제, 운동, 불면증, 가족, 집 등으로 번져 나가는 화제를 보자면, 말이란 일종의 전염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우리집 위층에 사는 사람들은 좀 시끄러워”라는 말을 신호로 이들은 다시 아래층과 옆집 사람들이 일으키는 소음과 민폐를 하소연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귀결은 “(관리소장 말이)우리집으로 항의가 들어왔대”라는 것. “학교 다닐 때 네 얼굴은 이제 기억도 안 난다.” “얘 좀 봐라, 너도 마찬가지야.”(‘사적 하루’)

“저럴 땐 진짜 아버지랑 똑같아요.” “아가씨도 자식인데 닮은 데가 왜 없겠어요?”(‘잘 지내고 있을 거야’)

성형으로 바뀐 얼굴을 두고 두 동창이 나누는 대화,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성깔을 물려받은 오빠를 두고 시누이와 올케가 주고받는 대화에서 보듯, 최정나 소설 속 인물들은 자주 티격태격하고 날선 말로 서로를 찌르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들은 세속이라는 커다란 어항 속을 하릴없이 헤엄치는 물고기로서 공동 운명체에 가깝다. 그들을 일러 속물이라 할 수는 있겠으되, 자신이 그 속물이라는 범주에서 자유롭다고 장담할 수 있는 이는 얼마나 될 것인가.

첫 소설집 <말 좀 끊지 말아 줄래?>를 낸 소설가 최정나가 30일 오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첫 소설집 <말 좀 끊지 말아 줄래?>를 낸 소설가 최정나가 30일 오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 대한 오마주로 읽히는, 지난해 젊은작가상 수상작 ‘한밤의 손님들’, 가장의 생일을 맞아 개고기를 끓여 놓고 오지 않는 손님들을 기다리는 노부부와 그 아들 부부를 등장시킨 등단작 ‘전에도 봐놓고 그래’, 단종된 콘돔을 찾아 헤매는 불륜 커플 이야기인 ‘메리 크리스마스’ 등 최정나의 소설들은 연극적 구성이 두드러지는 가운데 한결같이 돌출적일 정도의 개성을 과시한다. 광고 일을 오래 하다 뒤늦게 문학에 입문한 작가의 이력 덕분이 아닐까 싶다. 30일 만난 작가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연극적이라기보다는 가상의 곳이라는 생각을 평소에 한다”며 “사람들의 말을 엿듣다 보면 쓸데없으면서 웃기고 짠하기도 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은데, 그런 느낌을 소설에 담으려 한다”고 말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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