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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저물어 가는 노인들의 마을

등록 2019-06-07 06:01수정 2019-06-07 09:35

송은일 연작 장편 ‘대꽃이 피는 마을…’
제 몫의 한을 품고 운명에 맞서는 노인들
평범한 삶이 알려주는 비범한 진실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 년
송은일 지음/문이당·1만4000원

송은일의 연작 장편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 년>은 짧은 단편 열여섯으로 이루어졌다. 전남 고흥 작가의 고향 마을을 모델로 삼은 ‘금당 마을’이 배경이다. 고향 마을의 평범한 사람들 이야기를 재구성했다는데,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있고 개별적 삶에 보편적 진실이 깃들며 지역이 ‘중앙’의 거울임을 책을 읽으니 알겠다.

큰뜸, 안뜸, 작은뜸, 잿등, 뒷재, 국새, 사장, 새토구, 안산울, 솔각지, 동정지, 스무실, 안소재, 도투메기, 제비나리, 오종굴, 갯가, 서당골, 붉은데기….

금당 마을 안팎의 땅이름들을 가만히 읊노라면, 허파 안에 산소가 가득 차는 듯 청량한 기운으로 심신이 맑아지는 느낌이 든다. 책에 실린 이야기들을 읽고 난 느낌도 그와 비슷하다.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이 무탈하고 행복하기만 하다는 뜻은 아니다. 진실은 오히려 그 반대여서, 생로병사로 요약되는 고해(苦海) 같은 인생사에서부터 지극히 미세한 감정의 흔들림까지 크고 작은 고통과 고뇌가 그들을 붙잡고 놓아 주질 않는다. 소설 속 한 대목처럼 “속내까지 온전한 사람이 없듯이 근심 없는 집도 없는 것이다.”

연작 장편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 년>을 낸 소설가 송은일. “친정 마을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시작했는데, 이웃 사람에게 이야기한다는 심정으로 편하게 쓰다 보니 오히려 더 세심하게 쓰게 되더라. 작품을 마치고 나서는 친정 마을과 그곳 어른들에게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고 <한겨레>와 전화 인터뷰에서 말했다. 송은일 제공
연작 장편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 년>을 낸 소설가 송은일. “친정 마을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시작했는데, 이웃 사람에게 이야기한다는 심정으로 편하게 쓰다 보니 오히려 더 세심하게 쓰게 되더라. 작품을 마치고 나서는 친정 마을과 그곳 어른들에게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고 <한겨레>와 전화 인터뷰에서 말했다. 송은일 제공
일흔다섯살 병선 씨는 대보름 동네 잔치에 갔다가 “저만치에 있는 남편 용국 씨를 보게 됐는데 불현듯이 구역질이 치밀었다.” 급히 집으로 가서 실컷 토한 병선 씨는 이와 몸을 닦고 옷도 갈아입은 다음 즉흥적으로 버스에 올라 서울에 홀로 사는 딸 민화네로 간다. 팔순인 남편과 아들들의 전화 독촉에도 병선 씨는 딸네 집에서 버티며 문화센터에서 장구를 배우고 식당에서 일을 하는 새 삶을 고집한다. 젊은 날 남편이 손찌검을 한 적은 있지만, 그것도 다 옛 말. 이제 와서 집을 뛰쳐나갈 이유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데, 딸 민화는 엄마의 출분에서 사르트르에 못지 않은 철학적·존재론적 맥락을 읽어 낸다.

“병선 씨의 구토는, 삶의 근원에서 돌출한 본질적인 문제이자 철학적인 것이었다. 당신 스스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모든 것에 대한 저항이자 거역이며 삶에 돌연히 찾아든 위협이었다. 자신의 삶, 전생(全生)이 치명적인 흉기처럼 변해 찌르고 들어온 것이었다.”

송은일이 2013년에 낸 장편 <매구 할매>의 주인공 매구 할매가 이 연작에도 등장한다. 딸네 집에 머무는 동안 병선 씨는 소설 속 소설 <매구 할매>를 읽으며 매구 할매 진녹두의 가여운 삶에서 모든 여성들의 운명을 본다. “불쌍한 여자는 녹두만이 아니라 이병선이었고 금당 아낙네들이기도 했다. 아니 세상 모든 여자들이었다.”

불쌍한 것이 여자들만도 아니다. 여든두살 홀아비 춘근 씨는 “끼니때마다 방황하기 일쑤”다. 막내 아들 부부가 아버지를 모신다지만, 태국 며느리는 한국 음식이라면 질색을 하며 따로 태국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바로 집 옆인 여자 경로당에서는 안노인들이 수육이며 백숙, 김치국이며 비빔밥 등 매일같이 메뉴를 바꿔 가며 해 먹지만 “아낙들은 양사(=남자 경로당)에 있는 늙은 남정들을 몰라라 했다.” 남자 노인들이 돈을 갹출해 읍내에서 자장면을 배달시켜 먹기로 하고, 거기에 며느리가 동참하는 소설 속 하루는 그래도 해피엔딩에 속한다.

연작 장편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 년>의 작가 송은일. 송은일 제공
연작 장편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 년>의 작가 송은일. 송은일 제공
서정춘의 시 ‘죽편’에서 제목을 따온 <대꽃이…>는 이문구의 ‘우리 동네’ 연작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박경리의 <토지>를 읽는 느낌도 준다. 주인공이든 조연 및 단역이든, 심지어는 실물로는 등장하지 않고 이름으로만 거론되는 인물조차도, 모두가 제 몫의 한을 지닌 채 운명에 맞선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 모든 운명의 끝에는 약속처럼 죽음이 기다리는데, 그나마 집에서 명을 다하는 이는 복 받은 축에 속한다. 요양원으로 가게 된 전평댁의 안타까운 하소연을 들어 보라. “잘들 있으쇼야. 다시는 못 보겄네. 여그서 놀다가 죽고 자펐는디. 요양원 같은 디 안 가고 내 집서, 우리 동네서 픽 죽고 자펐는디, 나는 어짜까. 어짜문 쓸까.”

금당 마을의 상징적 중심 구실을 하던 매구 할매의 죽음으로 소설도 마무리되지만, 책장을 덮은 뒤에도 동네 사람들의 그 뒤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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