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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숫자의 지배로 부활하는 ‘봉건적 신분관계’

등록 2019-06-07 06:01수정 2019-06-07 09:33

노동법 대가 알랭 쉬피오의 강의
‘숫자에 의한 협치’로 법치 약화돼
기업·노동 ‘봉건적 주종관계’ 부활
“국가의 주권 회복과 연대 복원해야”
숫자에 의한 협치-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2012~2014)
알랭 쉬피오 지음, 박제성 옮김/한울·3만9500원

“자유로운 인민에게 지도자는 있지만 주인은 없다. 자유로운 인민은 법률을 따르고, 법률만을 따르며, 법률의 힘에 의해 사람을 따르지 않는다. (…) 자유는 법률과 함께 번성하거나 쇠퇴한다. 이것보다 더 분명한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장 자크 루소는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 당시 누구보다도 뜨거운 문장으로 법률의 지배라는 이상을 옹호했다. 법치는 고대 그리스로까지 소급하는, 오랫동안 이상향으로 그려져 온 지배 방식이었다. 사람들은 통치자의 자의에서 벗어나 자유와 평등을 지키기 위해 법의 지배를 추구해왔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런 비인격적 지배를 추구하는 방식에 법치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법치만큼 인간의 상상력 속에 오랫동안 존재해온 것이 바로 ‘숫자에 의한 협치’(수치)였다. “모든 것은 숫자로 정리된다”고 한 고대 그리스 피타고라스의 계승자들은 신학·음악·윤리학·법학에서도 숫자 형식의 합법칙성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비인격적 지배의 극단적인 형태인 숫자에 의한 협치는 20세기부터 고도로 발달한 디지털 기술과 극단적 자유주의 사상과 만나 점점 현실화되기 시작한다. 이런 거대한 변화를 법철학의 관점에서 풀어낸 저서가 바로 알랭 쉬피오(70)의 <숫자에 의한 협치>다.

알랭 쉬피오 콜레주드프랑스 교수는 지난달 27일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국제노동기구(ILO) 탄생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한 바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알랭 쉬피오 콜레주드프랑스 교수는 지난달 27일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국제노동기구(ILO) 탄생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한 바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쉬피오는 노동법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다. 국제노동기구(ILO)에서 ‘100주년 선언’의 토대로 삼기 위해 만든 ‘일의 미래 보고서’ 위원회에 법학자로는 유일하게 참가하기도 했다. 그는 낭트대학교를 거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롤랑 바르트, 피에르 부르디외, 미셸 푸코 등이 있었던 콜레주드프랑스의 법학 분야 석좌교수로 2012년 선출돼 ‘사회국가와 세계화: 연대에 관한 법학적 분석’이란 강좌를 지금까지 맡고 있다. <숫자에 의한 협치>는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쉬피오가 진행한 이 강좌를 담은 책이다.

법치가 주권적인 판단, 민주주의적 심의에 근거한 통치 모델이라면, 수치는 효용 계산에 근거한 자율 조정 장치를 모델로 삼는다. 숫자에 의한 ‘통치’가 아닌 ‘협치’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여기엔 법을 제정하는 신이나 국가와 같은 초월적인 제3자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법치가 운전자의 판단에 따라 운행되는 수동기어 자동차라면, 수치는 내비게이션을 따라 운행하는 자동차 또는 자율주행 자동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숫자에 의한 협치가 법의 지배를 전복시키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다. 특히 1970년대 브레턴우즈 체제가 붕괴하고 변동환율제가 도입된 이후에 전 지구적 차원에서 ‘시장’을 자연과 노동의 가치를 판단하는 유일한 심판으로 세우려는 숫자에 의한 협치가 점점 세를 넓혀가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라는 시장 패러다임은 국경을 철폐하고, 국가를 종속시키며, 노동과 자연을 보호하는 법을 해체한다. 더욱이 최근의 디지털 혁명과 결합해선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역설적이게도 숫자에 의한 협치는 타인의 자의와 속박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는 비인격적 통치의 이상을 실현하기보다는, 약자가 강자에게 인격적으로 예속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것이 쉬피오의 핵심적인 주장이다. 법치가 쇠퇴하고 국가의 주권이 흔들리면서 모든 제도의 심장부에서 ‘봉건적 주종관계’가 다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기업과 노동이다. 영주(지배기업)와 소작인(하청·유통·납품업체)으로 계층화된 기업 구조는 갑을 관계를 기반으로 계약적 신분관계를 만들어낸다.

다른 한편 노동자들은 숫자에 의한 협치로 인해 ‘총동원’되는 체제로 내몬다. 노동자들은 과거 테일러주의적 컨베이어벨트의 흐름에 맞춰 강제적인 동작들을 반복하는 노동이 아니라, 할당받은 목표를 달성하는 ‘유연한’ 노동을 하게 된다. 이제 노동자들은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통제된 자유 안에서 자신의 신체부터 정신까지 인격 모두를 동원해야 한다.

좀 더 거시적으로 쉬피오가 보기에 숫자의 지배는 현재 극단적 민족주의, 근본주의, 인종차별주의 등이 득세하는 주 원인이다. “국가가 사람들의 신체적, 경제적 안전과 정체성을 보증하는 역할을 더는 담당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종족이나 종교 또는 민족이나 범죄집단에 소속되는 것에서 보증을 구하고 자기보다 더 강한 자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 외에 다른 출구가 없기 때문이다.”

미화 1달러 뒷면에 그려져 있는 조화를 상징하는 테트락티스 형태의 미합중국 국장. 피라미드의 꼭대기엔 섭리의 눈이 있어 새로 탄생한 국가를 굽어살핀다. 테트락티스는 고대 그리스 피타고라스학파의 상징으로 숫자 10을 도해한 것이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미화 1달러 뒷면에 그려져 있는 조화를 상징하는 테트락티스 형태의 미합중국 국장. 피라미드의 꼭대기엔 섭리의 눈이 있어 새로 탄생한 국가를 굽어살핀다. 테트락티스는 고대 그리스 피타고라스학파의 상징으로 숫자 10을 도해한 것이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쉬피오는 이제 우리가 봉건적 주종관계를 해체하고, 법의 주체인 국가의 주권을 복원하며 연대를 재조직하는 어려운 과업을 떠맡아야 한다고 말한다. “연대를 조직하는 독점적 지위를 상실한 국가는 이제 국민연대와 시민연대 그리고 주종관계의 네트워크 속에서 직조되고 있는 국제연대의 결합을 보증하는 보증인이 되어야 한다. (…) 이 길로 들어서는 첫걸음은 민주주의 원칙의 복원일 것이다. 유럽연합이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있는 정치적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경제적 영역에서도 민주주의 원칙은 복원되어야 한다. 노동하는 자들에게 자신들이 하는 노동의 목적과 의미를 장악할 수 있는 힘을 되돌려줌으로써.”

이 책을 번역한 박제성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낭트대학교에서 쉬피오의 지도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박 위원은 <한겨레>와 통화에서 “쉬피오 교수는 노동법을 실정법으로 해석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철학적 차원으로 끌어올려 분석하는 작업을 수행해왔다. 이 저작에서 그는 현대사회를 법과 수의 대비로 해석하며 어떤 식으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는지 이해하도록 돕는다”라고 말했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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