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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세상을 바꾼다는 엘리트들의 속임수

등록 2019-06-07 06:01수정 2019-06-07 16:33

신흥 엘리트·지식소매상 ‘윈윈’ 하는
민주정치 대체 ‘박애자본주의’ 폭로
가치·도전·혁신 등 ‘좋은 말’ 갖다 쓰기
한국의 ‘착한 기업’ 선언과도 겹쳐보여
엘리트 독식 사회-세상을 바꾸겠다는 그들의 열망과 위선
아난드 기리다라다스 지음, 정인경 옮김/생각의힘·1만8000원

자, 최태원 에스케이(SK) 그룹 회장의 ‘사회적 가치’ 선언과 이재웅 쏘카 대표의 거침없는 ‘혁신’ 행보, 아마존 최고경영자 제프 베이조스의 전 부인 매켄지 베이조스의 통 큰 기부에 찬사를 보내는 이들이라면 이 책에 주목해보자. 예술가, 연예인, 인플루언서, 부자들의 ‘선한 영향력’에 러브콜을 보내려는 지식인이나 활동가들도 잠깐 걸음을 멈추고 책장을 넘길 일이다.

책의 경력이 우선 화려하다. <파이낸셜타임스>가 선정한 2018년 ‘올해의 책’이었다. 지난해 미국에서 발간되었을 때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조지프 스티글리츠가 <뉴욕타임스>에 서평을 썼다. 스티글리츠는 지난 20년 동안 경제적 불평등 악화를 입증하거나 세계화·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을 밝히는 책들이 다수 나왔는데 이제 “새로운 장르”가 나올 때가 되었다고 기대감을 높였다. 그 ‘새 장르’가 바로 <엘리트 독식 사회>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엘리트 독식 사회>의 지은이 아난드 기리다라다스는 다보스 포럼 등 비즈니스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기업가들의 콘퍼런스를 지속적으로 비판해왔다. 우크라이나 페미니스트 그룹인 ‘페멘’이 2012년 1월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다보스/AFP 연합뉴스
<엘리트 독식 사회>의 지은이 아난드 기리다라다스는 다보스 포럼 등 비즈니스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기업가들의 콘퍼런스를 지속적으로 비판해왔다. 우크라이나 페미니스트 그룹인 ‘페멘’이 2012년 1월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다보스/AFP 연합뉴스

지은이 아난드 기리다라다스.  ⓒMackenzie Stroh, 생각의힘 제공
지은이 아난드 기리다라다스. ⓒMackenzie Stroh, 생각의힘 제공
책은 선출 권력도, 국제기구도 아니면서 “세상을 변화시키겠다”고 앞장선 글로벌 엘리트들의 위선을 속속들이 폭로한다. <뉴욕타임스>의 전 칼럼니스트이자 매킨지 애널리스트로도 일한 바 있는 지은이 아난드 기리다라다스는 승자들의 ‘인류 구원 프로젝트’와 그들에게 후원 받는 ‘지식 소매상’의 활약을 상세하고도 풍자적으로 묘사한다. 그는 스스로 이 책이 일종의 르포르타주 작업이라고 설명했는데, 본인이 ‘내부자이자 외부자’로서 직접 목격하거나 인터뷰한 이야기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책을 내게 된 계기는 지은이가 2011년 아스펜 연구소 헨리 크라운 펠로우에 선정되면서부터였다. 세상을 움직이는 리더들이 제공한 안락한 전용기에 몸을 실은 그는 특혜와 사치를 누리면서 미심쩍은 의문을 가졌다고 한다. “변화의 리더라는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

2014년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 참석한 에어비앤비 창업자 브라이언 체스키. ‘공유경제’ ‘윈윈’ 같은 단어를 사용하며 사업을 확장해가는 새로운 기술 권력 엘리트들은 세상의 상태를 개선하는 낙관주의를 갖고 있다고 하지만 현실에선 여러 문제를 낳고 있다. 다보스/로이터 연합뉴스
2014년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 참석한 에어비앤비 창업자 브라이언 체스키. ‘공유경제’ ‘윈윈’ 같은 단어를 사용하며 사업을 확장해가는 새로운 기술 권력 엘리트들은 세상의 상태를 개선하는 낙관주의를 갖고 있다고 하지만 현실에선 여러 문제를 낳고 있다. 다보스/로이터 연합뉴스
이 책에 아이디어를 제공한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예로 들 것도 없이, 세계의 불평등은 심화되고 있다. 인류 상위 10%는 전 세계 부의 90%를 보유하게 되었다. 세계 자원의 절반에 해당하는 몫을 가진 단 8명의 억만장자 중에는 빌 게이츠, 마크 저커버그, 제프 베이조스 등이 이름을 올렸고 이들 대부분은 “기술이 평등을 촉진할 것”이라고 했던 분야에서 돈을 벌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11년 오큐파이 운동을 겪으면서도 0.001%의 부유한 엘리트들은 극단적 불평등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분노에 의아해 했다. 그러나 예의 유능함과 관대함으로 빈곤이나 기후변화 등 인류의 문제를 도맡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현 상태로부터 이익을 얻으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좋은 일도 해내는 신흥 권력 엘리트의 세계”를 지은이는 ‘마켓월드’라고 정의한다. 자선단체, 학계, 언론, 정부, 민간 싱크탱크의 동료들로 구성되는 이 ‘박애 자본주의’의 교의는 ‘윈윈주의’이다. 이들은 ‘지속 가능한’ ‘기술 혁신’ ‘나눔’ ‘연대’ ‘사회적 선’ 같은 이타심의 치유 언어, 운동의 언어까지 도용하고 전유했다. 하지만 그 사전에 ‘불평등’ ‘사회’ ‘구조’ ‘노동조합’, 무엇보다 ‘규제’는 없다. 불쌍한 이들을 도우며 돈을 턱턱 내놓는 부자들은 공적인 해결책을 요구하거나 권력의 재분배와 엘리트의 원죄를 발설하는 사람들을 지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바로 세계의 문제를 미세조정할지언정 시스템은 유지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지은이는 분석한다.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벤처 기업가들과 유명인사들의 강연이 이어지는 ‘서밋 앳 시’(Summit at Sea) 같은 프로그램에서 네트워크를 만들고 인맥을 쌓는 이들은 비즈니스가 주변을 변화시키는 방법이라고 믿지만 이런 ‘윈윈’에 대한 믿음은 사실상 불평등에 기여한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서밋 앳 시 누리집 갈무리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벤처 기업가들과 유명인사들의 강연이 이어지는 ‘서밋 앳 시’(Summit at Sea) 같은 프로그램에서 네트워크를 만들고 인맥을 쌓는 이들은 비즈니스가 주변을 변화시키는 방법이라고 믿지만 이런 ‘윈윈’에 대한 믿음은 사실상 불평등에 기여한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서밋 앳 시 누리집 갈무리
‘공공지식인’(public intellectuals)이 “비판자”이자 “권력의 적”이라면 출세지향적인 ‘지식 소매상’(thought leader)은 대부호들과 어울리며 지금과 같은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는 정당화 이론을 제공한다. 이들은 테드(TED) 강연을 하고 다보스, 선밸리, 아스펜, 빌더버그, 다이얼로그 등의 콘퍼런스와 세련되고 화려한 서밋에 초대받는다. 지식상들은 엘리트가 불편하지 않게, 가해자로 지목받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면서 희생자에 초점을 맞춘다. 약자의 눈물과 지원에 집중하는 대신 문제의 원인을 은폐해 분노를 억제하도록 한 것이다. 50년 전 페미니스트들이 외친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란 구호도 완벽하게 뒤집었다. “정치적인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 축소해 ‘구조’를 외면하도록 했다.

아마존 최고경영자 제프 베이조스, 넷플릭스의 최고경영자 리드 헤이스팅스와 작가 말콤 글래드웰 등은 ‘서밋 앳 시’에서 강연했다. 이 뜨거운 유람선 위의 선상축제에는 명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명상인, 인플루엔서 들의 만남이 줄을 잇는다. 서밋 앳 시 누리집 갈무리
아마존 최고경영자 제프 베이조스, 넷플릭스의 최고경영자 리드 헤이스팅스와 작가 말콤 글래드웰 등은 ‘서밋 앳 시’에서 강연했다. 이 뜨거운 유람선 위의 선상축제에는 명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명상인, 인플루엔서 들의 만남이 줄을 잇는다. 서밋 앳 시 누리집 갈무리
지은이는 최근 몇년간 유명세를 떨친 세계적 학자들을 줄줄이 소환하는데, 토머스 프리드먼과 니얼 퍼거슨 등을 아예 ‘지식 소매상’이라고 못박고,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도 “지식 소매상들의 세계적인 족장”으로서 마켓월드에 포섭되었다고 했다. 인류의 역사를 검토하면서 긍정적이고 진일보한 측면을 강조했던 스티븐 핑커와 조너선 하이트 또한 권력이 없는 사람들의 좌절과 염려를 사소한 것으로 취급한다며 비판했다.

“마켓월드는 정부를 제치고 변화와 진보의 동력으로 부상했다.” 문제는 공적인 것, 사회적인 것이 밀려난다는 점이다. 승자들은 논쟁적인 민주정치의 과정을 혐오한다. 기업가의 박애 자본주의는 지금의 구조를 공고히하고 자신들로 향하는 분노를 막는 불가피한 선택임을 지은이는 보여준다. ‘마켓월드의 윈윈 교의’는 반드시 대가를 요구하며, 세계의 곤경을 심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엘리트들의 활동을 완전히 ‘악’으로만 보려는 건 아닐 터다. 다만, 그들의 낙관주의와 자선이 구조적 문제를 은폐하고 민주주의 정치를 가로막으면서 불평등한 제도를 혁파하는 운동과 이론을 봉쇄하는 건 아닌지, 신중하게 검토해봐야 한다는 진지한 충고인 셈이다.

책 곳곳에 강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한국의 상황과 겹쳐서다. 우버 투자자인 셔빈 피셔바가 파리의 택시 운전사들이 벌인 시위를 ‘폭동’이라 규정하고 자신을 반란군 지도자로 묘사한 장면은 특히 한국의 택시 갈등을 떠올리게 한다. 조직 내 성차별 ‘구조’를 부각하는 페미니스트 학자의 강의에 반발하는 엘리트들의 모습도 최근 성평등강의를 중단시킨 한국의 공무원, 경찰 간부, 학교장들 같은 관료 엘리트의 사례와 겹친다.

파워포인트와 엑셀을 사용한 프리젠테이션용 ‘프로토콜’의 허상을 폭로하는 책인 탓에, 깔끔한 통계나 참고문헌도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명징하게 직조한 날렵한 이론을 기대한다면 조금 허망할 수는 있다. 자본가, 지식인, 정치인 엘리트의 구분을 명확하게 하지 않아 다소 혼란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승자들의 ‘선한 영향력’ 뒤에 숨은 맥락을 폭로하고 정치와 민주주의를 회복해야 한다는 결론의 타당성은 의심할 바 없이 강력하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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