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오전 서울 성신여대입구역 근처에서 시작된 문학 기행 ‘신동엽의 서울 시대’에서 신동엽 시인 역할을 맡은 배우 김중기가 신동엽이 일하던 헌책방에서 부인 인병선 짚풀생활사박물관장과 처음 만나던 장면을 연기하고 있다.
“충남 보령에서 교사 생활을 하며 가족과 떨어져 지내던 아버님은 각혈을 하고 몸이 안 좋아져서 가족과 떨어져 지내며 아픈 몸을 치료하셨는데, 1959년 2월에 이곳 천변에 셋방을 얻어 처음으로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62년 성북구 동선동 5가 45번지에 집을 장만해 이사할 때까지 3년여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아버님은 출판사 교육평론사를 거쳐 명성여고 교사로 일하셨고 4·19 혁명을 목격하고 그 열망을 담은 시 ‘아사녀’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신동엽(1930~1969) 시인의 아들인 신좌섭 서울의대 교수가 15일 오전 서울 성북구 보문로 안감내천변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신동엽 50주기를 기념해 ‘신동엽의 서울 시대’라는 이름으로 열린 문학기행 참가자들에게 신동엽 시인의 삶에서 이 공간이 지닌 의미를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신좌섭 교수의 설명에 앞서서는 ‘환생한 신동엽’ 역할을 맡은 배우 김중기가, 신동엽이 이곳에 살면서 겪은 4·19의 의미를 설명하고 그와 관련된 신동엽의 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를 낭독했다.
신동엽 서울 문학 기행은 신동엽이 부인 인병선(짚풀생활사박물관장)씨와 처음 만난 성신여대입구역 근처 헌책방 자리에서부터 시인 부부가 처음 장만한 자가(自家)이자 시인이 숨질 때까지 생활했던 옛집, 시 ‘종로5가’의 배경인 종로5가, 시인이 근무했던 옛 명성여고 자리 등 시인의 삶과 문학의 자취가 아로새겨진 서울 시내의 공간 일곱 곳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신동엽학회가 주관하고 문화체육관광부와 창비, 한국작가회의가 후원한 이 행사에는 독자 35명이 참가했다.
배우 김중기는 신동엽으로 빙의되어 각 공간이 신동엽 시인의 삶과 문학에서 지니는 의미를 설명하고 해당 공간과 관련된 작품을 낭독했으며, 신좌섭 교수는 아버지 신동엽 시인의 생전 면모와 기억을 들려주었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는 총괄기획을 맡아 대본을 구성했을 뿐만 아니라, 박봉우 시인과 김수영 시인 역할을 맡아 김중기 등 배우들과 함께 연기를 펼치기도 했다. 이밖에도 신동엽학회장인 정우영 시인과 맹문재 안양대 교수, 최종천 시인, 원로 문학평론가 구중서 전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등이 설명을 보탰다.
15일 오전 서울 안감내천변에서 이어진 신동엽 문학 기행에서 김수영 시인 역할을 맡은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오른쪽)가 신동엽 시인 역할인 배우 김중기와 연기를 하고 있다.
신동엽 시인이 1962년부터 숨질 때까지 8년간 생활한 옛집은 적어도 신동엽 시인의 서울 연고지 가운데서는 가장 중요한 공간임에도 그런 의미를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개량 한옥이었던 집은 허물어진 채 그 자리에 다세대주택이 들어서 있고, 그 흔한 표지석 하나 보이지 않았다. 신좌섭 교수는 “충남 부여의 아버님 생가를 보존하는 데 급급해서 서울의 이 집은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아버님은 워낙 산을 좋아하셔서 정릉 쪽 북한산에 가실 때에는 아버님 손을 잡고 따라 다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며 “아버님은 매우 다정다감하고 따뜻한 분이셨고 오히려 어머니가 엄한 편이었다”고 회고했다.
시의 무대인 종로5가가 내려다 보이는 세운상가 테라스에서 정우영 시인은 “‘종로5가’는 신동엽 시에서는 드물게 자본과 노동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시”라며 “신동엽의 시 세계에서는 전반적으로 민족과 농촌이 두드러지지만, 그 밑바닥에서는 시인이 자본주의의 문제를 응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이어진 문학 기행이 끝난 뒤 일행은 서울 시청 인근 음식점에서 뒤풀이를 했다. 하루 종일 신동엽 시인으로 빙의되어 열연을 펼친 배우 김중기는 “신동엽 시인이 되어 연기를 한다는 건 다른 어떤 연기보다 크게 부담이 되었다”며 “시인이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라는 시에서 강조하신 ‘외경’과 ‘연민’이라는 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김응교 교수는 “신동엽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박봉우 시인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리고 인간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외로운 가운데 신동엽 시인을 특히 믿음직스럽게 여겼던 김수영 시인의 마음은 어땠을까 짐작하며 연기하는 게 행복했다”고 말했다.
신좌섭 교수는 “아버님의 삶과 문학 세계를 책으로만 접하는 것보다 이렇게 흔적들을 찾아다니며 재구성해 본 일은 처음이어서 재미도 있고 의미도 컸다고 본다”며 “앞으로 부여와 제주 등의 아버님 흔적까지 더해 문학 지도를 만들 계획이라니 기대가 크다. 성북동 집터 등 연고지에 표지판을 세울 수 있도록 관계 기관이 배려해 주시면 고맙겠다”고 말했다.
글·사진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15일 서울 성북구 신동엽 시인의 옛집 자리에서 실시된 문학 기행에서 신동엽 시인의 아들인 신좌섭 서울의대 교수(오른쪽)가 생전의 부친에 대해 회고하고 있다. 옆은 신동엽 시인 역할을 맡아 설명하고 연기한 배우 김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