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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일 안해도 빵 먹을 권리 있다

등록 2005-12-22 18:09수정 2005-12-23 15:07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인간이 한낱 기계 부품으로 전락하고 만 세태를 풍자한 찰리 채플린 영화 <모던 타임즈>의 한 장면.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자본주의 절대명제는 이제 서서히 허물어지고 노동과 소득을 분리해 바라보는 새 패러다임을 만들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인간이 한낱 기계 부품으로 전락하고 만 세태를 풍자한 찰리 채플린 영화 <모던 타임즈>의 한 장면.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자본주의 절대명제는 이제 서서히 허물어지고 노동과 소득을 분리해 바라보는 새 패러다임을 만들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명제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 없는 세상 이젠 노동과 소득을 분리해 부를 나누는 새로운 방법 찾을 때
포커스

80년대 중반, 독일을 비롯한 몇몇 유럽 나라들에선 ‘Jobber운동’이라는 이름의 사회운동이 등장해 잠시 눈길을 끈 바 있다. 원래 Jobber란 사전적인 의미로, 법정 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채 2개 이상의 불안정한 일자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현실에선 다양한 형태의 파트타임 노동자나 임시직 및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중복돼 이해되는 경우도 많다. 특이한 건 이들이 내세운 주장이었다. 이들에게선 전통적인 노동운동이 으레 내걸었던 고용 안정이나 일자리 창출 등의 구호가 사라진 대신, “모든 사람들에게 1500마르크씩을!”이라는 낯선 주장이 터져 나왔다. 자신들이 원하는 건 단순히 일자리가 아니라, 소득이라는 얘기였다.

이처럼 Jobber운동에서 처음 등장한 ‘새로운’ 사회운동의 맹아는 1995년 프랑스 사회를 중심으로 유럽대륙으로 번져갔던 실업자 운동에서 좀 더 구체적 형태를 띠게 됐다. ‘실업에 맞서 함께 행동을!(AC)’이라는 이름의 실업자 운동조직이 중심이 된 당시의 운동은 11월부터 진행된 노동자 총파업과 맞물리면서 한 단계 비약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없는 자들의 선언’이라는 파격적인 선언문이 등장한 건 이런 배경에서였다.

Jobber운동이나 실업자 운동을 여타의 사회운동, 특히 전통적인 노동운동과 구분지은 건 단지 그럴듯한 일자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운동 주체로 나섰다는 데만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핵심은 이들의 주장 속에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 명제인 ‘노동(생산)과 소득(분배)의 일치’에 대한 거부 내지는 공격의 단초가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관건은 단지 일자리를 나눠 갖는 게 아니라, 사회적 부 자체를 나눠 갖는 것이라는 얘기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노동(생산)으로부터 ‘분리된’ 소득(분배)의 가능성, 달리 말해 사회 구성원이면 누구나 일종의 ‘시민소득(citizen income)’이라는 보편적 권리를 지닐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열어젖힌 셈이다.

오랜 자본주의 역사에서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에 참여한 사람이 손에 쥐게 되는 소득은 당연히(!) 그 사람이 생산과정에 기여한 바에 따라 결정됐다. 뭐니 뭐니 해도 자본주의의 고갱이는 인간의 존재 가치를 ‘노동(생산)’과 한 묶음으로 본다는 데 있다. 그렇기에 생산영역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못하는 한, 달리 말해 일자리를 꿰차고 있지 못하는 한, 그 사람이 손에 쥘 수 있는 소득이란 원론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존재 의의가 무참히 짓밟히는 것은 물론이다. 체제로서의 자본주의를 긍정하든, 혹은 그 문제점을 직시하든 사정은 마찬가지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가사가 인터내셔날가 가락에 실려 전 세계 노동자들에게 퍼져 나간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하지 않는 자가 먹지 못하는 건 도덕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적어도 체제를 구성하는 논리상, 사회의 부를 늘리는 데 ‘기여’한 바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 관객도 창작에 기여”


이 대목에서 잠시 영화감독 고다르가 남겼다는 한 마디는 곱씹어볼 만하다. 그는 현대사회에선 영화(혹은 TV프로그램)의 시청자들도 작품 창작에 엄연히 기여했으니, 그들에게서 시청료(관람료)를 거두는 게 아니라 오히려 수익의 일부를 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한 천재적 아티스트의 요설로 비칠지 모르나, 그의 주장에는 섣불리 내치기 힘든 알맹이가 담겨 있다. 그의 주장은 한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관계를 뿌리채 흔들어 놓았다. 오늘날 한 사회가 만들어낸 물질적 가치란 그야말로 ‘사회적’ 생산물이며, 따라서 최종 산물이 나오기까지 각자가 얼마만큼 기여했는지를 정확히, 말하자면 ‘수학적으로’ 따지기는 힘들다. 경제 영역의 낯익은 언어로 옮겨 보자면, 한 사회가 만들어낸 물질적 가치의 총합(GNP·국민총생산)은 흔히 경제활동인구라 불리는 사람들이 담당했던 몫의 단순 총합 그 이상이란 뜻일 게다. 현대사회의 생산함수란 자본과 노동, 그리고 기술의 조합만으로는 온전히 설명될 수 없는, 하나의 미로인 까닭이다. 고다르의 시야는 이 지점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노동과 소득의 일치라는 절대명제를 문제 삼는 일이 단지 GNP라는 경제용어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의의만 지니는 건 아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자본주의의 필요악인 실업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를 근본적으로 되새겨보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자본주의 역사에서 실업이란 언제나 ‘비정상’ 상태로 받아들여졌다. 설령 ‘산업예비군’이라는 분석 도구를 끌어들인다고 해서 사정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실업이란 언제나 노동자들의 연대를 가로막거나 임금 하락 요인으로 작동하는 ‘예외적 현상’이었을 뿐이다.

문제는 현대자본주의가 질적인 변화를 겪게 되면서 실업의 의미가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높은 실업률에 허덕이는 선진 각국의 경험은 이제 더 이상 ‘완전고용’이 존재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생산영역에 투입된 적도 없긴 했지만, 어쨌든 이제는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그렇다고 사회의 부, 예의 GNP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끊임없이 새로 생겨나는 다양한 직종이 우리의 시야를 일시적으로 가려주기도 하지만, 현 단계 과학기술에 바탕을 둔 주요 산업의 고용유발효과는 이미 현저하게 떨어진 상태다. 어느 새 실업이 ‘정상’인 시대로 성큼 접어든 것이다.

이제 남는 문제는 급속히 변화하는 세상에 걸맞게, 사회적 부를 나눠 갖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싹을 만들어 나가는 일일 게다. 생산영역에서 ‘튕겨 나온’ 사람들, 달리 말해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빵을 주는 실마리를 찾아야 하고, 일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빵을 주는 여유를 되찾는 일 말이다. 유럽 대륙의 몇몇 나라들에서 등장했던 새로운 사회운동이 던져주는 진정한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실업이 ‘비정상’에서 ‘정상’으로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많은 나라들에선 노동으로부터 ‘분리된’ 소득이라는 실험을 실시하고 있기는 하다. 흔히 근로소득보전세제(EITC)라 불리는 제도도 넓게 보면 이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이런 실험은 기존의 복지제도를 시장관계의 지배 아래 포섭시키는 ‘자유주의적 개혁’의 일환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과도한 복지제도 부담을 줄인다는 명목 아래 모든 다양한 복지제도를 대폭 축소하는 대신, 일정한 ‘근로소득’ 수준을 정해 그 수준에 밑도는 사람들의 소득 일부를 보전해 주는 방식 말이다. 형식적으로는 앞서 언급했던 사회운동이 던진 메시지와 한데 포개지면서도, 실상은 그나마 유지됐던 복지제도 자체를 허물어뜨리는 정반대 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이런 사실은 EITC를 둘러싼 논란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과도한 복지부담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는 실마리로서 이 제도를 도입한 선진 각국과는 달리, 복지제도 자체가 재대로 갖춰지지 않은 우리의 경우엔 자칫 질 낮은 일자리를 늘리고 최저임금 수준 자체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는 탓이다.

하지만 설령 ‘자유주의적 개혁’으로 환원될 위험이 존재한다 치더라도, 사회 구성원이 누라는 소득을 노동 그 자체로부터 분리시키는 패러다임의 싹을 키워 나가야 할 필요성은 분명 커지고 있다. 올 초 한국을 찾았던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 역시 “일자리가 줄어드는 현실을 필연적 추세로 받아들이되, 사회적 부를 나눠갖는 새로운 분배 패러다임이 필요함”을 역설한 바 있다. 현실 속에선 경영학자들이 말한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의 싹이 이미 성큼성큼 자라고 있는 셈이다.

냉정하게 말해, 오랜 인류 역사에서 자본주의란 곧 빈곤과 노동이 마침내 둘로 갈라서는 통로였다. 삶에 지쳐 이 마을 저 마을을 부랑하던 자본주의 이전 시대의 수많은 빈민층(the poor)은 ‘노동자’가 되어 빈곤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났다.
최우성
최우성
기껏해야 마을이나 종교 공동체의 시혜 대상에 머물렀던 빈민층이 스스로 제 벌이를 하는 자랑스런 노동자로 탈바꿈했다. 자본주의 이전 시대를 특징짓던 키워드인 ‘생존권’에 견줘, ‘노동권’이 마침내 승리한 것이다. 하지만 21세기 초입의 세상에서 빈곤과 노동은 다시금 한 길에서 조우하는 듯 보인다.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은 늘어만 가고, 사람들은 설령 일자리를 찾는다 해도 턱없이 부족한 소득만을 안겨주는 질 낮은 일자리에 만족해야만 한다. 오랜 자본주의 역사를 특징짓던 노동권이라는 절대명제가 빠르게 허물어지는 지금, ‘생존권’은 우리에게 ‘오래된 미래’로 성큼 다가오는지 모른다. 분명 그 첫 걸음은 노동과 소득을 일치시키던 ‘낯익은’ 패러다임으로부터 결별할 용기임에 틀림없다.

최우성/<이코노미21> 편집장 morgen@economy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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