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의 사랑김세희 지음/민음사·1만3000원
“우리는 모두 손을 잡고 다녔다. 모두들 끌어안고 있었고, 서로의 품에 기대어 5분 또는 10분간 짧은 잠을 잤다.” “여학생들의 사랑은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았다.” “그 엄청났던, 소녀들의 사랑하려는 욕구.”
김세희의 첫 장편 <항구의 사랑>에서 여학생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그 사랑의 유일성과 영원성을 믿는다. 2000년대 초 항구도시 목포의 여자 중고생들은 아이돌 가수들이 동성 커플로 등장하는 팬픽을 쓰고 읽었으며, 남학생이 아닌 같은 학교 여학생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았다. “같은 학교 여학생을 사귀는 것과 달리 (남학생을 사귀는 것은) 저편으로 넘어가 버리는 일처럼 여겨졌다.” 여학생끼리의 사랑이 ‘이편’의 일, 그러니까 정상성의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이성애가 ‘저편’의 일, 곧 비정상성으로 간주되는 것이 그들의 문법이었다.
여자 중고생들의 동성애적 사랑을 그린 소설 <항구의 사랑>을 낸 김세희. “이 소설에는 나 자신의 경험이 많이 들어가 있다”며 “십대의 경험과 감정은 미성숙하고 유치한 것이라는 가치관을 그동안 스스로 내면화해 왔던 건 아닌가 하는 반성을, 소설을 쓰면서 했다”고 말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소설 화자이자 주인공인 준희에게는 초등학교 시절 데미안처럼 자신을 챙겨 주던 친구 인희가 있다. 중학교 3년을 떨어져 있다가 고교에 입학해서 재회한 인희는 그사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중학 시절에 이미 동성애 편력으로 유명세를 탔던 인희는 “거드름 피우는 또래 남학생들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준희는 그런 인희를 멀리하고 오히려 인희를 경멸하는 규인과 가깝게 지낸다.
준희와 규인은 손을 잡고 다니며 학교 음악실 소파에서 끌어안은 채 말을 나누기도 하지만, 준희가 본격적으로 사랑하게 되는 이는 한 학년 위인 민선 선배다. 민선 선배를 향한 준희의 마음은 어느 연애 소설 주인공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강렬하고 순정하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는데도 그녀와 마주하면 그녀의 존재는 놀랄 만큼 신선했다. 그녀의 매력은 내게 고통스러울 정도로 빛을 잃지 않았다.”
민선 선배가 실제로 그처럼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인가 하면, 실상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자신의 사랑의 정당성과 필연성을 검증 받고자 준희는 규인에게 묻는다. “민선 선배가 예쁜가? 예쁜 얼굴인가?” 규인의 대답은 짧고 잔인하다. “추녀야.” 규인의 판단에 개입했을 편견의 몫을 깎아 내고 보더라도, 민선 선배의 외모가 그다지 빼어나지는 않았다고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규인의 이런 ‘판정’이 민선 선배를 향한 준희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훼손하거나 방해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일방적인 만큼 필연적으로 종말에 이르고, 스토킹에 가까운 집착과 방황을 거쳐 준희는 마침내 마음을 접는다. 재수 끝에 대학에 입학하면서 준희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갔다.” 그 세계에서는 누구도 팬픽을 쓰거나 읽지 않고, 여자라면 모름지기 남자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었다.
여자 중고생들의 동성애 경험을 그린 자전적 소설 <항구의 사랑>을 첫 장편으로 낸 소설가 김세희가 19일 오후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그렇게 새로운 세계에 적응해 가는 준희에게 어느 날 인희가 다시 나타난다. “놀랍게도 인희는 고등학교 시절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짧은 머리에 워커와 힙합 바지 차림인 인희는 안타깝게 묻는다. “우리 고등학교 때 말이야. 그건 다 뭐였을까?” 준희는 그런 인희의 시선을 피한 채 단호하게 말한다. “그땐 다 미쳤었어.”
이것이 준희가 인희에게 한 마지막 말이었고 이야기도 거기서 끝이 나지만, 그것으로 소설 자체가 마무리되는 것은 아니다. <항구의 사랑>은 그 시절로부터 십수년이 지난 시점에서, 지금은 작가가 된 주인공이 지난 시절을 돌이키며 그 시절 자신들을 사로잡았던 열정의 정체와 의미를 탐구하는 얼개를 지녔다. 민선 선배를 향한 사랑은 서툴러서 실패했다지만, 준희의 더 큰 잘못은 인희로 대표되는 ‘어떤 사랑’을 편견으로 왜곡하고 부정했다는 데에 있다. 그 사실을 늦게서야 깨닫고, “이 이야기의 한편에 인희가 있다는 걸” 비로소 인정하는 것으로 소설은 온전하게 마무리된다.
19일 오후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작가는 “사랑의 스펙트럼은 생각보다 넓고 가변적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며 “나뿐만 아니라 주변의 여성들 모두가 비슷한 경험과 기억을 가지고 있던데, 이 소설을 계기로 그런 경험담과 회상이 더 많이 나왔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여자 중고생들의 동성애 경험을 그린 자전적 소설 <항구의 사랑>을 낸 소설가 김세희.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