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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다른 얼굴로 찾아올 뿐

등록 2019-06-28 06:01수정 2019-06-28 20:06

2008년 금융위기는 신용망 붕괴 과정
‘발화지’ 미국 넘어 세계로 불씨 퍼져
2012년 유로존 위기도 ‘한몸’으로 봐야
포퓰리즘 앞세운 위기 ‘변이’ 단계
붕괴-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아카넷·3만8000원

2008년 9월16일.

158년 역사의 세계 4위 투자은행 리먼 브러더스가 허공으로 사라진 다음날인 이날, 미국 맨해튼에선 제63차 국제연합(UN) 총회가 시작됐다. 행사장엔 곤경에 처한 세계 최대 경제 대국을 내심 조롱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남의 불행을 은근히 즐기는 태도는 유럽 곳곳에서도 감지됐다. 입담 좋기로 이름난 이탈리아 재무장관은 “이탈리아의 금융 시스템은 영어를 사용하지 않기에 아무 문제 없다”며 허풍을 떨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의 눈엔 그저 미국이 만들어낸, 미국의 위기였을 뿐이다.

158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투자은행 리먼 브러더스가 2008년 9월15일 파산 신청을 낸 뒤, 한 시민이 미국 뉴욕에 있는 이 은행의 본사 건물 앞에서 ‘다음 차례는 누구?’라고 쓴 팻말을 들고 서 있다. 뉴욕/AP 연합뉴스
158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투자은행 리먼 브러더스가 2008년 9월15일 파산 신청을 낸 뒤, 한 시민이 미국 뉴욕에 있는 이 은행의 본사 건물 앞에서 ‘다음 차례는 누구?’라고 쓴 팻말을 들고 서 있다. 뉴욕/AP 연합뉴스
안도감이 비명과 통곡으로 바뀌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미국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에서 지펴진 작은 불씨는 커다란 화마가 되어 순식간에 지구촌을 집어삼켰다. 왜 그랬을까. 미국 컬럼비아대 역사학 교수인 애덤 투즈는 “국경을 가로지르는 은행들 사이의 청구권 흐름”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전 세계 은행들 사이의 신용이 내부로부터 붕괴하는 과정이야말로 2008년 금융위기의 진짜 얼굴이었다.

전 세계를 잇는 신경망(금융망)에서 핵심 연결고리 역할을 한 건 미국보단 외려 유럽이었다. 유럽 은행들은 변동성이 높은 도매자금 시장에 지나치게 의존했다. 2008년 당시 미국의 양대 모기지 업체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이 보증해주지 않는 고위험 모기지 담보부증권(MBS)의 약 29%는 유럽 투자자들이 쥐고 있었다. 유럽 대형 금융기관들은 미국에서 단기로 달러를 빌려와 아시아와 동유럽에 장기로 빌려주는 사실상의 글로벌 헤지펀드 역할을 떠안았다. 심지어 중국에서 미국으로 흘러간 자금 가운데 ‘여러 이유에서’ 벨기에를 경유한 규모도 상당했다. 실핏줄처럼 촘촘하게 전 세계를 연결한 금융망이 위기의 불씨를 실어나른 건 당연했다.

정작 위기가 퍼지자 미국과 유럽이 보인 행보는 크게 달랐다. 미국의 중앙은행(연준)은 법령 13조3항에 따른 비상권한을 발동해 어떤 종류의 모기지 담보부증권이라도 필요한 만큼 매입해주겠다며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통상의 통화정책 틀을 벗어난 이른바 ‘양적 완화’는 2012년까지 세 차례나 이어졌다. 이처럼 전 세계를 상대로 한 연준의 ‘최후의 대부자’ 역할은 미국 이외의 중앙은행에 사실상 달러 발행권을 용인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함께 돈풀기에 나서라고. 유럽의 한 중앙은행 관계자가 “우리는 연준의 13번째 지역 중앙은행이 된 셈”이라 말한 것도 충분히 이해됨 직하다.

갈팡질팡하는 유럽의 모습은 미국과 크게 대비된다. 통화는 하나로 합쳤으되, 통합 감독 기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유로존으로선 피하기 힘든 혼란이었다. 회원국 사이의 이해관계가 얽힌 탓에 유로존의 중앙은행인 유럽중앙은행(ECB)은 처음부터 제구실을 못 했다. 각국 지도자들 사이의 신뢰 기반도 허약했다. 금융위기 초기 해법을 찾자며 만난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회담 결렬 뒤 제각기 보인 반응은 상징적이다. 사르코지가 측근에게 털어놓은 말. “그녀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자기가 싼 똥은 자기가 알아서 치우라더라!” 독일 쪽은 메르켈이 대문호인 괴테의 이야기를 인용했다며 이와는 다른 설명을 내놨다. “모든 사람이 자기 앞을 쓸고 닦으면 도시 전체는 자연스럽게 깨끗해진다.”

더딘 행보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부실을 제때 떨쳐버리지 못한 유럽 은행들의 취약한 대차대조표는 기어이 또 한 번의 폭발음을 냈다. 모두가 불안에 떨며 유럽을 지켜봐야 했다. 2012년 불거진 그리스·아일랜드·스페인·이탈리아 등 유로존 위기를 2008년 금융위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한몸으로 봐야 하는 이유다.

그나마 유럽에서 변화의 기운이 나타난 건 이탈리아 경제학자 마리오 드라기가 새 유럽중앙은행 총재로 취임하고서다. 1970년대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MIT)에서 공부한 ‘아메리칸 스타일’의 ‘벤 버냉키 친구’(연구실 동료)의 등장으로 유럽중앙은행의 행보는 부쩍 연준을 닮아갔다. 유로존의 유일한 연방기관이라 할 유럽중앙은행은 단기국채매입프로그램(OMT) 형식의 유동성을 쏟아냈다. 그가 클린턴 정부와 오바마 정부 경제팀을 연결하는 ‘골드만삭스 인맥’의 일원이었다는 점도 의미 깊다. 클린턴 정부의 재무장관인 로버트 루빈과 래리 서머스를 필두로 한 골드만삭스 출신들은 두 정권 내내 미국 정부 핵심 요직에 포진하며 ‘거버먼트삭스’란 별칭을 탄생시킨 바 있다. 지은이는 유럽중앙은행의 뒤늦은 ‘미국화’에 의미를 둔다. 유로존 위기를 진정시킨 동력이자, 동시에 “미국은 자신이 만들어낸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유일한 국가임을 다시 각인시킨 계기”란 이유에서다.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대가 2011년 10월11일 미국 뉴욕 맨해튼의 부유층 거주지역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뉴욕/AFP 연합뉴스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대가 2011년 10월11일 미국 뉴욕 맨해튼의 부유층 거주지역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뉴욕/AFP 연합뉴스
위기는 이제 끝난 것일까. 지은이는 ‘아니다’라고 단칼에 못 박는다. 요동치던 금융시장은 진정되었을지언정 다수의 삶은 훨씬 피폐해졌다. 화재를 진압한다며(위기 대응) 쏟아낸 어마어마한 실탄(유동성)은 나라를 가릴 것 없이 소수 자산계층의 두둑한 주머니만 더욱 불린 꼴이다. 서브프라임모기지에서 유로존까지…. 21세기 세계 경제를 덮친 일련의 위기 드라마는 고삐 풀린 금융자본주의의 단점을 교정·보완할 정치(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줬으나, 불행히도 한발 앞선 건 우파의 한 무리였다. 화마 속에서 포퓰리즘이라는 괴물이 등장한 건 최대 비극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극우 보좌관이었던 스티브 배넌은 외쳤다. “나는 레닌파 공산주의자다.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현재의 모든 제도를 파괴하고 싶다”고.

과연 현재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건 ‘어떤’ 위기일까?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위기의 반복이 아니라 변이(mutation)와 전이(metastasis)다.” 슬그머니 경제 위기에서 정치 위기, 지정학적 위기로 무게를 옮기는 지은이의 해답이 썩 명쾌하진 않다. 그런데도 “지금은 위기가 시작되기 전에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불편하고 혼란스런 시기”라는 진단만큼은 내치기 어렵다.

2019년의 세상.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 시대에 불확실성은 세계 경제의 상수다. 굳이 한가지 확실한 걸 꼽으라면, 앞선 두 번의 위기(금융위기와 유로존 위기)를 어렵사리 헤쳐나오는 과정에서 국제 사회가 기댄 최소한의 ‘정치적 자본’조차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는 점 아닐까. 그래서 더 위기라고.

최우성 기자 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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