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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노동운동이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

등록 2005-12-22 21:30수정 2005-12-23 15:12

김재영 첫 소설집 <코끼리>
김재영 첫 소설집 <코끼리>
2000년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으로 등단한 김재영(39)씨가 첫 소설집 <코끼리>(실천문학사)를 묶어 냈다.

표제작 <코끼리>는 발표 당시부터 주목받은 평판작이다. 주인공은 네팔 출신 노동자 아버지와 조선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열세 살 소년. 부모가 불법체류자 신세인 만큼 ‘나’는 문서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학교에도 청강생으로 다닐 뿐, 표나는 피부색 때문에 친구들에게도 따돌림을 당한다. 게다가 엄마는 가난과 힘든 노동이 싫어서 집을 나가 버린 상태.

소년이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축사를 개조한 쪽방 가옥과 동네는 가히 세계화의 살아 있는 전시장 같다. 소년네 옆방에는 방글라데시 아주머니, 미얀마 아저씨들, 러시아 아가씨 등이 살고 있다. 동네 가게 탁자에 둘러앉아 술을 마시는 남자들은 한국어와 러시아어, 영어와 네팔어가 뒤섞인 여러 나라 말로 제각기 떠든다. 술과 안주도 국적별로 제각각.

소설은 도둑질로 시작되어 강도짓으로 끝난다. 소년네 옆방에 살던 ‘비재 아저씨’가 힘들게 벌어 감춰 놓았던 돈을 룸메이트였던 파키스탄 청년이 훔쳐 달아나는 것이 소설의 문을 연다면, 동료들에게 노랭이 소리를 들어 가며 악착같이 돈을 모은 인도 아저씨가 밤길을 걸어서 귀가하다가 강도를 당하는 것이 소설의 결말이다. 우연찮게 소년만이 현장을 목격하는데, 놀랍게도 강도짓을 한 사람은 바로 비재 아저씨.

김재영. 김종수 기자
김재영. 김종수 기자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국경을 넘어 노동력을 팔러 다니는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들이 서로를 등쳐먹을 정도로 궁지로 내몰리고 있다는 것이 작가의 의도였을 것이다. 자칫 문학 외적인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작가의 시아버지는 유명한 통일운동가 백기완씨다. 백씨는 작년 가을 며느리의 작품이 처음 잡지에 실렸을 때부터 결말 처리에 ‘불만’을 표했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진짜 적은 따로 있는데, 왜 그 적을 등장시키지 않았느냐는 취지였다. 작가는 이참에 책으로 내면서도 굳이 결말을 바꾸지 않았는데, 진짜 적이 눈에 보이지 않고 약자들끼리 서로를 해치는 상황이야말로 사실과 진실에 부합한다는 ‘고집’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러시아 출신 무용수를 등장시킨 <아홉 개의 푸른 쏘냐> 역시 외국인노동자 문제를 다루고 있다. 외국인노동자 문제를 대하는 작가의 관점은 이 소설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주인공을 위기에서 구해 주는 러시아 유학생 출신 남자 ‘그’의 선택에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이른바 ‘386 세대’에 해당하는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는 학생운동 경험자들의 뒷얘기가 종종 등장한다. 그들이 주변 사람들에게서 듣는 말은 천편일률적이다. 이제는 세상이 좋아졌으니 운동은 필요없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자정의 불빛>에서 공인회계사가 된 ‘나’는 학생운동에 열심이었던 옛 연인 ‘진임’에게 “세상 살기가 나아진 탓”(199쪽)이라며 “진보? 우스운 소리 마”(207쪽)라고 일갈한다. <국화야, 국화야>에서도 학생운동을 하다가 제적된 뒤 대학에 재입학하려는 주인공에게 교수가 하는 말이 “이제 세상도 좋아지고 했으니 뭐 싸울 일이 있겠냐만”(342쪽)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들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자정의 불빛>의 진임에 의해 이렇게 대변된다: “그럼… 우리가 입고 먹고 쓰는 것들은 다 어디서 난 것들이지요?(…) 누군가 만들지 않는다면 말예요.”(206쪽) 진임의 말은 여전히 세상은 노동하는 이들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이고 그들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한 운동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없이 가볍고 경쾌하게만 돌아가는 세태에 우직할 정도로 진지하고 따뜻한 작가의 태도가 믿음직스럽다.

글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김종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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