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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돌아온 ‘시인 장정일’, 위악과 자기 모멸의 복귀신고

등록 2019-08-02 06:01수정 2019-08-02 21:04

28년 만의 신작시집 ‘눈 속의 구조대’
거친 언어와 자극적 표현 난무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 흔적도
눈 속의 구조대
장정일 지음/민음사·1만원

‘시인 장정일’이 돌아왔다. 마지막 시집 <천국에 못 가는 이유>(1991) 이후 무려 28년 만에 신작 시집 <눈 속의 구조대>를 내놓으며 시업 복귀를 신고했다.

장정일은 1984년 무크 <언어의 세계>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해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1987) <길안에서의 택시잡기>(1988) 등을 내며 새로운 감수성의 출현을 알렸다. <햄버거에 대한 명상>은 그에게 제7회 김수영문학상을 안겨 주었다.

그 뒤 장정일은 소설로 방향을 틀었다. <아담이 눈뜰 때>(1990)를 필두로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너에게 나를 보낸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 같은 문제적 소설들을 연이어 발표하며 시에 이어 소설 장르에도 자신만의 인장을 뚜렷이 새겼다. 그러는 동안 시는 팽개쳐 두었다. 언젠가 만났을 때 시에 관해 물었더니, “쓰는 법을 잊어버렸다”는 답을 돌려주기도 했다.

오랜 시적 침묵을 깨고 펴낸 시집 <눈 속의 구조대>는 생물학적 나이와 상관 없이 장정일이 여전히 젊고 도발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새 시집에는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연상시키는 아이러니와 반어, 허를 찌르는 유머도 있지만, 가학·피학 성애와 신성모독, 자기 모멸과 파괴를 향한 열망을 담은 거친 언어가 난무한다.

사는 동네의 맥도날드 매장이 폐점했다는 소식에 시인은 개탄한다. “온통 맥도날드가 널려 있는 세상에/ 맥도날드가 없는 동네라니”(‘시일야방성대곡’). “한 컵에 두 개의 빨대를 꽂고/ 이마를 맞댄 채 얼음 채운 콜라를 마시던 곳/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찾아온/ 우리의 보리수”가 없어진 사태를 안타까워하는 모습은 “맛이 좋고 영양 많은 미국식 간식”(‘햄버거에 대한 명상’) 레시피를 친절하게 설명하던 30년 전 장정일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시집에 실린 더 많은 시들은 그의 소설들에서 익숙하게 보았던 위악과 자기 혐오의 몸부림을 담았다. 특히 소설로는 이례적으로 금서가 되었으며 작가 자신은 음란물 제작 혐의로 형을 살게 했던 문제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1996)의 흔적이 곳곳에서 내비친다.

“당신은 내 엉덩이에 매질을 했지/ 메트로놈 박자처럼 메말랐던 매질/ 주위가 하얗게 변해 가고 있어”(‘내 말이 그 말이야’)에서 서로의 엉덩이를 때려 가며 가학·피학 성교에 매달리던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남녀 주인공을 떠올리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육군 대위가 지어 준 이름으로 시인이 되기는 싫었다 (…) 아버지가 지어 준 이름을 벗어날 수 없다면 아버지의 문법을 파괴하자고 결심했다”(‘K2’)에서, 역시 <내게 거짓말을 해봐>에서 신과 아버지를 합한 억압적 존재 ‘신버지’의 그림자를 확인하는 것도 마찬가지.

28년 만에 신작 시집 <눈 속의 구조대>를 내놓은 장정일. “나는 K2/ 적지에 던져진 병사/ 총탄을 맞고 울부짖는/ 게릴라”(‘K2’)라는 구절에서 그가 생각하는 자신의 문학적 정체성을 짐작할 수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28년 만에 신작 시집 <눈 속의 구조대>를 내놓은 장정일. “나는 K2/ 적지에 던져진 병사/ 총탄을 맞고 울부짖는/ 게릴라”(‘K2’)라는 구절에서 그가 생각하는 자신의 문학적 정체성을 짐작할 수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소년원 시절/ (…) // 대장들의 성기에서는 권력의 냄새가 났다/ 나는 끌리듯이 그 힘을 탐닉했다/ 얼굴 없는 여자들이 그랬듯이/ 대장들의 정액을 위장 깊숙이 삼켰다”(‘얼굴 없는 사랑’ 부분)

“예, 예, 꼴리는 대로 부르셔요. 나는 김수영 장정일입니다. 포르노 작가라고 비웃지 않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올시다. 나는 세상의 항문을 빨겠습니다. 당신 혀가 닿지 않는, 당신이 빨지 못하는 항문을 빨아 드리겠습니다.”(‘양계장 힙합’ 부분)

인용한 대목들을 비롯해, <내게 거짓말을 해봐> 재판부라면 또 다시 음란물로 판정할 법한 구절들이 시집에서는 빈발한다. 그러나 이런 ‘음란한’ 묘사가 “오, 빨리 사라져 버려라/ 나는 사라져 버려라”(‘내가 없는 세상’)에서 보이는 위악과 자기 혐오의 다른 표현이라는 사실을 21세기 독자라면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엄살과 과장이 없지 않은 대로 장정일은 우리가 감추고 억압하려는 세계의 어떤 진실을 드러내고자 하며, 그 과정에서 모두가 피하고 싶어하는 낮고 더러운 자리에 기꺼이 자신을 놓고자 한다.

“캄캄한 항문을 보여 줘/ 당신이 가장 감추고 싶은 것/ 당신이 줄 수 없는 것/ 당신에게 없는 것/ 당신이 아닌 것을 줘/ 침과 오줌과 똥// (…) //내가 맡은 냄새를 당신에게 옮기고 싶어/ 침과 오줌과 똥/ 우리는 창조해야 돼/ 입맞춤이 거부당한 곳에서 생겨나는/ 꼬물거리는 구더기/ 구더기를”(‘구더기’ 부분)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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