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a:image/s3,"s3://crabby-images/bbbed/bbbed89abf1f9a57928cd9a4341dd206e51ff78e" alt="그림속의 음식, 음식속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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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속의 음식, 음식속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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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속의 음식, 음식속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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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사는 왕조사·정치사의 거시적 그물에 걸리지 않는 옛 사람들의 구체적인 일상을 살피는 분야다. 이 미시적 역사연구가 진척되면서 이 땅의 조상들이 어떤 표정으로 살았는지 조금은 더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게 됐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마음 속 스크린 위에 떠올려 볼 수도 있게 됐다. 조상들이 풍속화의 미장센 밖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민속사학자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쓴 <그림 속의 음식, 음식 속의 역사>는 이렇게 역사 밖으로 나온 조상들이 무얼 먹고 마시고 살았는지 살피는 책이다. 말하자면 풍속화 속에 소품으로, 소도구로만 배치된 밥상과 그릇과 음식에 카메라의 초점을 옮겨 클로즈업한 것이 이 책이다. 음식도 의복처럼 일종의 문화이므로, 그 변화상은 시대의 변화상을 반영하는 ‘역사의 그릇’ 노릇을 한다. 이 책은 23편의 조선 후기 풍속화들을 통해 서민과 양반과 궁중의 음식 문화를 추체험한다.
이 책이 전해주는 ‘진실’의 하나는 우리가 고유의 전통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생활 문화가 기껏해야 100년 전에 보편화한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가령, 19세기 중엽 유숙의 그림 <대쾌도>를 면밀히 검토해 보면 그 시절 사람들이 쓰던 그릇의 종류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릇 종류와 다름을 알 수 있다. 이 풍속화에서 씨름판 아래 자리를 편 술 장사꾼이 늘어놓은 술단지는 텔레비전 사극에서 흔히 보는 것과 다르다. 사극에는 유약을 발라 빤질빤질 윤이 나는 오지그릇이 등장하지만, 19세기 중엽만 해도 오지그릇은 찾아보기 쉽지 않았고, 보통은 유약을 바르지 않은 질그릇이 쓰였다. 그림에 나오는 회색 술단지가 유약을 바르지 않고 맨 진흙을 구운 질그릇이다. 19세기 말~20세기 초에야 오지그릇이 보편화한 것으로 보인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대쾌도>의 아래쪽에 술을 파는 좌판이 펼쳐져 있는데, 갓 쓴 젊은 양반이 곱추 하인과 맞붙어 술 한 잔 마시기를 의논하고 있다. 술 장사꾼은 벌써 막걸리를 잔에 부어 이들을 유혹한다. 따르는 술이 막걸리라는 건 술단지의 입이 넓다는 것, 그리고 색깔이 희다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곱추 하인과 함께 온 젊은 양반은 허리춤의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며 못내 망설이는 눈치다. 이에 곱추 하인이 저도 먹고 싶은지 꼬드기는 모습이 역력하다.”
옛 사람들은 술을 즐겼지만 언제나 마음 놓고 마신 것은 아니었다. 영조 시대에는 술로 인한 사건·사고가 빈발하자 강력한 금주령을 실시했다. 그러나 그 시대에서 법을 어기고 몰래 술을 먹는 일은 다반사로 벌여졌는데, 그 시절 신윤복의 <주사거배>는 주막에 들러 선 채로 서둘러 술잔을 들이켜는 관리들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다. 소가 귀했던 그 시절 나라에서 소도살 금지령을 여러 차례 내리기도 했지만, 권세 있는 집안사람들은 집 바깥에서 숯불에 쇠고기를 구워 먹으며 소주잔을 걸치는 사치를 누렸음을 <야연>이라는 19세기 풍속화는 보여준다. 이 책은 또 일본과 교역이 빈번했던 왜관·동래 지역에서는 19세기 이전에 이미 스키야키 같은 일본 음식이 널리 유행했음을 알려준다.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을 당시에 위스키나 진과 같은 서양술이 수입됐음도 이 책은 전해준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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