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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공정해야 할 기회 사재기하는 그들, 그리고 우리들

등록 2019-08-30 06:00수정 2019-08-30 19:54

특권 누리고 불평등 악화시키는 사실 모른 체하며 ‘상위 1%’ 비난
교육 통해 부 대물림하고 인턴 자리 나눠 갖는 ‘중상류층’ 행태 고발
20 VS 80의 사회-상위 20퍼센트는 어떻게 불평등을 유지하는가
리처드 리브스 지음, 김승진 옮김/민음사·1만7000원

자녀를 명문대학에 보내고 고소득 일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연줄을 통해 알음알음 서로의 자녀에게 인턴 기회를 준다. 집값을 떨어뜨릴 만한 부동산 정책에 거세게 저항한다. 자신의 현재 지위는 전적으로 자신의 능력으로 이룬 것이라고 확신한다. 야구 경기로 치면 “삼루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자기가 삼루타를 친 줄”로 생각한다….

왠지 기시감이 들지만, 미국 사회 이야기다. 가장 부유한 ‘상위 1%’의 행태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1%가 불평등을 확대하고 사회를 망치고 있다”고 목청을 높이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들은 상위 1%를 비난하면서 자신들은 ‘99%’ 속에 숨는다. 대부분 자신이 특권을 누리며 불평등을 악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아니, 모른 체한다.

그래픽 동혜원, 출처 게티이미지뱅크·클립아트 코리아·한겨레 자료사진
그래픽 동혜원, 출처 게티이미지뱅크·클립아트 코리아·한겨레 자료사진
<20 VS 80의 사회>는 바로 이런 집단에 속한 지은이의 ‘반성문’으로 볼 수 있다. 저자인 리처드 리브스(50)는 영국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미국의 싱크탱크인 브루킹스연구소 선임 연구원으로 있다. “영국에 팽배한 상류 계급의 우월 의식과 계급 구분을 늘 싫어해” 미국 시민이 된 그는 “새 조국의 계급 구조가 내가 떠나온 옛 조국보다 오히려 더 견고하다는 것을 깨닫고 매우 낙심했다”고 한다. 그는 워싱턴에 인접한 메릴랜드주의 부유한 동네에 살고 있다. 책의 원제는 ‘꿈 사재기꾼들’(Dream Hoarders)이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야기여서 “우리”라는 표현이 많다.

중상류층은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길을 간다

이들은 ‘중상류층’이다. 가구 소득 기준 상위 20%(연간소득 11만2000달러·1억3500만원)에 해당하는 집단으로 고학력·고소득·전문직 일자리를 가진, 이른바 ‘먹물들’이다. 책은 이들의 위선과 불공정을 까발리며 고등 교육 등을 통해 부를 대물림하고 불평등을 고착화하는 행태를 고발한다. 미국 이야기이지만, 대부분 한국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은이는 ‘중산층’이라는 말이 상위 계층 사람들까지 포괄하는 “편리한 허구”라고 지적한다. 많은 불평등 담론이 상위 1%에 초점을 맞추면서 “20%의 책임을 쏙 빼놓는다”고 비판한다. 불평등 구조를 분석하려면 ‘중상류층-나머지’라는 구도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상위 20%와 나머지 80% 사이의 격차는 미국의 경제와 사회 모두에서 드러나는 ‘대격차’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격차는 더 커지고 있다. 저자는 집단별 소득 추이 등 자료를 통해 이를 보여준다. 상위 20% 가운데 최상위 1%를 제외한 19%가 미국 전체 부의 절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다는 추산도 있다.

중상류층은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길을 간다. “인적 자본 육성에서의 격차는 태내에서부터 시작한다. ‘태교를 위한 모차르트’를 틀어 주었느냐 아니냐 때문이라기보다는 산모의 건강과 건강 관리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중상류층 아이들은 부모의 교육수준이 높으며, 좋은 동네에 살고, 인근의 좋은 학교에 다닌다. “좁히기 어려운 격차는 여행, 책, 가정교사 등 ‘자녀의 풍성한 경험을 위한 지출’의 격차다.” 이런 지출은 상위 20% 가구가 하위 20% 가구보다 10배나 많다고 한다. 중상류층 자녀는 ‘대학 입학 컨설턴트’를 고용해 ‘좋은 대학’에 간다. 유명 작가한테 큰돈을 주고 ‘자기소개서’ 쓰는 법도 배운다. “대학에 합격하느냐 못 하느냐를 예측하게 해 주는 가장 강력한 변수는 추상적인 성취나 지능에 대한 지표가 아니라 어떤 부모를 두었느냐이다.” 교육수준이 높아지면서 4년제 대학 졸업장이 아닌 석·박사 학위가 중상류층의 표지가 됐다.

고등 교육이 불평등을 부채질한다

중상류층의 지위는 효과적으로 세습된다. “고소득은 가난의 대물림만큼, 혹은 가난의 대물림보다 더 경직적으로 대물림된다.” 중상류층 자녀가 어른이 돼 중상류층이 될 확률이 하위층 자녀가 하위층이 될 확률보다 더 높다. 상위 20% 가구에서 태어난 아이 중 44%가 성인이 됐을 때도 상위 20%에 속했고, 부모의 학력이 상위 20%인 가구에서 태어난 아이의 46%가 커서도 그와 비슷한 학력을 획득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부유한 집안은 자녀, 손주 대대로 계속 부유할 테지만 이 세습은 직접적인 상속을 통해서라기보다는 교육을 통해서 즉 유산보다는 학위를 통해 이뤄진다.” 교육의 중요성은 날로 커지고 있고 중상류층은 교육에 광적으로 집착한다. 고등 교육이 불평등을 부채질하는 꼴이다. 미국은 돈으로 대학 졸업장을 사기도 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사위 재러드 쿠슈너(38) 백악관 선임고문은 아버지가 하버드대학에 250만달러를 기부하고 얼마 뒤 하버드에 입학했다. 쿠슈너가 다닌 고등학교의 한 행정 담당자는 “학교 행정실 누구도 그가 실력으로 하버드에 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중상류층이 누리는 이익 중에는 불공정한 방식으로 얻는 것들도 있다. 지은이는 이를 ‘기회 사재기’(opportunity hoarding)라고 부른다. “중상류층이 실력을 갖춰서가 아니라 경쟁의 판을 조작해서 승자가 될 때 발생한다.” 한정된, 가치 있는 기회에 다른 이들의 접근을 불공정하게 막는 것이다. 기회 사재기 가운데 두드러지는 것들로 배타적인 토지 용도 규제, 불공정한 대학 입학 절차, 알음알음으로 이뤄지는 인턴 자리 분배 등 세 가지를 꼽는다.

부유한 사람들의 동네, 학교, 집값을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토지 용도 규제로 미국 부동산 시장이 심각하게 왜곡돼 있다고 한다. 소득이 낮은 사람들이 동네에 들어와 집값을 떨어뜨리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토지 용도 규제는 진보 성향의 도시들에서 오히려 더 배타적이다.” 시애틀은 주거지의 3분의 2가 단독 주택 지구인데, 시장이 고층 건물 주택을 허용하는 규제 개혁을 제안했으나 저항에 부닥쳐 무산되기도 했다. 불공정한 대학 입학 절차로는 미국 대학들의 ‘동문 자녀 우대’ 정책이 꼽힌다. 부모 중 한 명이 그 대학 출신이면 자녀가 우대를 받는다.

‘유리 바닥’을 깨 하향 이동성을 높여야

미국에서 인턴 경험은 대학 졸업자를 채용할 때 중요하게 고려되는 요인이다. 인턴 자리는 인맥과 연줄을 통해 서로 혜택을 주는 식으로 분배된다. 마이클 블룸버그가 뉴욕 시장을 지낼 때 뉴욕 시청 인턴으로 딸이 채용됐다. 뉴욕 시청의 ‘이해 충돌 심사위원회’는 그의 딸이 채용되도록 ‘특별 면제’를 해줬다. 2014년 빌 더블라지오 뉴욕 시장 때도 더블라지오의 딸과 아들이 인턴에 채용되도록 특별 면제를 해줬다. “아마 개인적으로 우리는 내 아이나 지인의 아이가 좋은 인턴 자리를 잡도록 돕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지도 모른다. 매우 진보적인 인사들도 그렇게 하는 것에 별다른 문제를 못 느끼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행은 시장을 왜곡하는 것이다.”

이런 기회 사재기는 ‘운동장’을 기울이는 것인데, 저자는 이를 중상류층 자녀의 ‘계층의 하향 이동’ 위험을 막아주는 ‘유리 바닥’이라고 부른다. 유리 바닥은 누군가에게는 ‘유리 천장’이 된다. 그래서 지은이는 독특하게 ‘계층의 상향 이동성’이 아닌 ‘계층의 하향 이동성’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 사회학자인 시모어 밀러는 “높은 계층의 아들들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허용하는 사회가, 평범한 계층의 똑똑한 아들들이 위로 올라갈 수 있을지언정 높은 계층의 아들들은 특권을 계속 유지하는 사회보다 더 열린 사회”라고 말한 바 있다. ‘아들들’을 ‘아들과 딸들’로 바꾸면, 오늘날 타당성이 더 크다고 한다.

저자는 기회 사재기를 막고 격차를 줄이기 위해 시행할 수 있는 일곱 가지 조처들도 제시한다. 물론, 출발점은 중상류층인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유리하고 특권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저자의 친구처럼 “나는 평일에는 불평등 문제를 비난하고, 주말과 저녁에는 불평등 강화에 일조해”라고 한탄만 해서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황상철 기자 roseb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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