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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유교에는 ‘변두리 인생’이 세상 바꿀 수 있다는 확신 있죠”

등록 2019-09-09 19:10수정 2019-09-09 19:26

[짬] 역사학자 백승종 교수

백승종 교수는 “20~30년 안에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다”며 “한반도가 전쟁의 참화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남북 화해가 절대 필요하다”고 했다. “1차 대전 때 독일 땅에는 포탄 한 발도 떨어지지 않았어요. 미국과 중국이 싸우더라도 절대 자기 땅에서는 싸우지 않을 겁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백승종 교수는 “20~30년 안에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다”며 “한반도가 전쟁의 참화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남북 화해가 절대 필요하다”고 했다. “1차 대전 때 독일 땅에는 포탄 한 발도 떨어지지 않았어요. 미국과 중국이 싸우더라도 절대 자기 땅에서는 싸우지 않을 겁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역사학자인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는 1999년 서강대 사학과 조교수로 부임했으나 재직 기간은 4년에 그쳤다. “독일 유학 중 태어난 세 아들이 한국 생활에 적응을 잘하지 못했어요. 대학은 장기 휴직도 가능하다고 했지만 그렇게는 못 하겠더군요. 사표를 내고 다시 독일로 갔죠.” 그 뒤로는 지금껏 비정규직 교수다. “서강대를 나와서는 정규직 교수 취업을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어요. 조선 시대도 문과 과거 급제자들이 관직을 한 시기는 평균 3년 정도입니다. 한국 사회가 원래 비정규직이 많았죠. 대신 제가 알고 싶은 주제들을 하나씩 탐구해 글로 써보겠다고 생각했죠.” 2일 경기 평택시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백 교수 말이다.

그는 1994년 독일 튀빙겐대에서 조선 시대 호남 땅 태인 고현내의 5백년 사회사를 다룬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 5백년의 사회적 변화를 독일에서 배운 미시적 분석 방법을 적용해 살폈죠. 서강대 사학과 대학원을 나와 독일 유학을 간 것도 서양의 역사 연구 방법론을 배우고 싶어서였죠. 독일에서 보니 숲이나 인구의 역사까지 연구하더군요. 그때 우리나라에는 그런 연구가 없었죠.” 박사 논문은 그의 첫 책 <한국사회사연구>(일조각, 1996)가 됐다. 그 뒤로 20권 가까운 책을 냈다. 조선 중기 이후 민간에 퍼진 예언서 <정감록>을 소재로 한 책도 일본어로 번역된 <한국의 예언문화사> 등 7권이나 된다. 작년엔 전 세계 상속의 역사를 다룬 책을 내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최근에는 중국 사서 중 하나인 <중용>이 조선 사회에 끼친 영향을 다룬 <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을 냈다.

<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 표지
<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 표지
저술에 대한 대중 반응도 괜찮은 편이다. “제 책들은 평균 3천권 정도는 나갑니다.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2012)과 <조선의 아버지들>(2016)은 2만권가량 팔렸죠.” 흥미로운 소재는 물론 대중 눈높이에 맞춘 서술도 판매고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10여년 전 시작한 대중 역사 강연도 요즘은 주 2회가량 한단다.

그는 역사 저술가로서 자신의 삶을 가족사와 연결지었다. “부친이 해방 공간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해 보안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르셨어요. 제가 6남매 중 장남인데 대학원 졸업할 무렵인 1985년에야 연좌제가 풀렸죠. 이념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했으나 좌절한 부친의 모습을 보면서 조선이란 사회가 우리가 모르는 형태로 바뀔 수도 있었는지,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이었는지에 관심을 가졌죠. 고교 1년 때부터 조선 시대에서 ‘변화에 대한 갈망’을 보려고 했어요. 전북대 사학과를 간 것도 동학을 연구하기 위해서죠.” ‘정감록 운동’에 흥미를 가진 것도 같은 이유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까지 여러 차례 정감록 운동이 일어납니다. 그 결과가 동학이죠. 비밀결사의 형태나 종교의 외피를 두르고 정치사회 운동을 한 정감록 운동이 바로 동학으로 이어졌죠.”

서강대 대학원 시절 스승은 고 이기백 교수였다. 이 교수의 대표 저술 <한국사신론>(1967)은 식민사학의 허구성을 체계적으로 비판한 최초의 책이란 평가를 받는다. “독일 유학을 결심했을 때 모두 반대했지만 이기백 교수와 전북대 사학과 시절 스승인 송준호 교수만 ‘의미가 있다’며 찬성하셨죠. 이 교수는 제가 대학원 2학기 때 쓴 논문을 역사 학술지에 실어줄 정도로 저를 아끼셨어요. 독일에서 박사 논문 주제를 정할 때도 한국이란 주제를 놓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조언하셨어요.”

<상속의 역사> 표지
<상속의 역사> 표지
그가 최근작에서 파고든 <중용>은 유교의 철학적 배경을 밝힌 책으로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가장 권위 있는 책이었단다. 주희가 <예기> 49편 가운데 <대학>과 <중용>을 떼어내 <논어> <맹자>와 함께 사서라고 이름 붙였다. “하늘이 명(命)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로 시작하는 <중용> 구절을 두고 조선의 왕과 신하들은 맹렬히 토론하고 다퉜다.

<중용>의 영향력은 어디에서 왔을까? “형이상학적이면서 실천적인 텍스트입니다. 중국에서 유학자들이 도교나 불교, 제자백가의 이단들과 사상 투쟁을 할 때 써먹은 책이죠. 이념적 도구였어요. 다른 사서들과는 수준이 달라요.” <중용>의 힘을 보여준 사례 하나를 들어달라고 하자 이렇게 답했다. “조선 후기 문신 윤휴(1617~1680)가 주자와 다르게 <중용>을 해석하자 송시열(1607~1689)이 윤휴를 사문난적(이단적 해석을 제시해 유학을 어지럽힌 역적이란 뜻)으로 몰아세웁니다. 이때부터 조선에서 주자의 <중용> 해석이 절대화했죠. 17세기 초만 해도 주자와 다른 의견을 이상하게 보지 않았어요. 학문은 해석인데, 해석이 절대화, 종교화하면 다른 해석과 만나지 못해요. 이게 바로 우리 근대의 문제로 나타났죠. 종교화하지 않고 다른 해석과 경쟁했으면 지금보다 더 아름답고 합리적인 세상이 되었을 겁니다.” 개혁군주로 불리는 정조의 <중용> 해석도 송시열 못지않게 완고했단다. “정조는 중용의 세부적인 것까지 학자들에게 물어 주자의 해석 그대로 답하도록 했어요.”

자녀 교육 위해 서강대 교수 접고
비정규직 교수·역사 저술가의 길
해방 뒤 이념투쟁서 좌절한 부친 보며
조선시대 변화 가능성 탐색에 관심
‘정감록’ ‘상속’ 이어 ‘중용’ 다룬 책도

“주자 해석 절대화가 근대 문제로”

성호 이익이나 이덕무, 홍대용, 최한기 등 성리학 내부에서 성리학을 비판적으로 보려는 중요한 흐름이 있었지만 결국 좌절을 겪으면서 18~19세기 조선의 보수화로 이어졌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대신 성리학 바깥에서 동학과 같은 움직임이 나타났단다. “하늘 천이나 공경할 경을 중시하는 동학의 근본 사상은 성리학에서 왔어요. 성리학 사상이 시대적 분위기 속에 녹아 있었거든요. 종교적 천재들이 그 사상을 날카롭게 잘라 종교에 갖다 붙여 선비들을 설득했어요.”

그는 자신을 ‘신성리학자’라고 했다. 유학의 근본정신이 지금 시대의 문제에 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제 조부가 전주향교 장의를 지내셨어요. 장의는 요즘 말로 의장입니다. 유생 대표이죠. 조부에게 어려서 한자를 배우고 전북대를 다닐 때는 간재 전우 학통을 이은 한학자에게서 사서 등을 배웠어요.” 요즘 세상에 유교를 말하면 시대착오적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느냐고 하자 이렇게 답했다. “공자란 사람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공자와 맹자는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악용된 사람일 가능성이 커요. 공자는 개인의 지적인 능력이나 지적인 자각을 통한 사회의 변화를 강조했어요.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과 윤리를 강조했죠. 신분은 중시하지 않았어요. 유교의 가장 큰 장점은 과거제로 뉴커머(신진 세력)의 등장을 허용한 것이죠. 세습해 관직을 주고받는 것을 벗어나려고 했어요. 유교도 양면이 있어요. 가부장적이거나 보수적인 점도 있지만 반대 측면도 있어요. 장점을 적극 살려 나가자는 생각이죠.” 덧붙였다. “공자가 <논어>에서 제자 둘을 극찬했어요. 안회와 중궁이죠. 공자는 중궁이 사회적으로 천한 사람이었지만 자질과 윤리성을 이유로 왕이 될만하다고 했어요. 공자가 모델로 삼은 순임금도 요즘으로 치면 외국인 노동자의 아들 정도 되는 밑바닥 아웃사이더였어요. 아웃사이더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이 유교에는 있어요.”

<중용> 3500자 가운데 가장 마음에 새기는 글귀를 묻자 ‘사변독행’이라고 했다. “중용 서문에 나와요. 생각을 깊게 하고 실천은 확실히 해야 한다는 말이죠. 제 일상생활의 지침입니다. 성실한 삶을 살라는 가르침이죠. 성실할 성은 유교 텍스트에게 가장 힘이 있는 글자입니다. 의무로만 하는 성실함은 성이 아닙니다. 성실한 악행이죠. 진정성을 가지고 실천하는 게 성입니다. 이 말은 자존감을 바탕으로 주위 사람들을 따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실천적 인간을 저한테 일깨웁니다. 누가 뭐라도 내 길을 간다는 그런 마음이 없으면 성실은 의미가 없어요.”

<중용>의 현재적 의미를 묻자 ‘생태주의’를 말했다. “<중용>은 열려있는 텍스트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하죠. <중용>은 1장부터 생태주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내용이 나와요. ‘중화에 도달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자란다’는 내용이죠. 중화는 생태계의 평화공존으로 볼 수 있어요. 그러니까 1장 내용은 중화에 도달하면 우주만물이 제각각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다할 수 있게 되어 생태계의 모든 생물, 무생물까지도 최상의 상태에 도달한다는 의미이죠.”

백승종 교수.              강성만 선임기자
백승종 교수. 강성만 선임기자
계획은? “다음 관심은 세종입니다. 세종은 성리학을 처음으로 한국 사회에 적용하려고 했던 왕입니다. 이른바 ‘성리학적 전환’을 꾀한 왕이죠. <중용> 공부도 깊이 하려고 했지만 당시엔 전문가가 없어 직접 <중용> 전문가 양성에 나섰어요. 성호 이익에 대한 책도 쓰려고요. 조선 5백년을 통틀어 인식의 지평이 가장 넓었던 사람입니다. 정약용이나 최한기도 대단한 학자이지면 당대 나라밖 학자들과 견줬을 때 가장 우뚝했던 분이 성호 이익이죠.”

그가 집필 때 가장 신뢰하는 참고문헌은 <조선왕조실록>이다. “사실 모든 텍스트는 오염된 텍스트이죠. 하지만 실록은 오염의 정도가 제일 적어요. 이해관계가 다른 이들이 편집에 참여하고 사건 뒤 오래 지나지 않아 10~20년 만에 만들어지기 때문이죠. 문집은 실록보다 편집을 훨씬 많이 해 객관성이 떨어지죠.”

인터뷰를 마치며 ‘인생의 책’을 물었다. “독일 역사학자 한스 울리히 벨이 19세기 독일사를 다룬 책입니다. 두권짜리인데, 한국어 번역은 되지 않았어요. 그는 전체로서의 역사를 강조합니다. 역사는 바로 사회의 역사라고 했어요. 사회는 정치 경제 문화의 총합이라고 봤죠. 정치 경제 문화가 복잡한 양식으로 결합한 게 사회라는 것이죠. 이 책을 보면서 제가 연구하는 게 바로 사회의 역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역사학 연구의 길에서 저한테 ‘단절적 분화를 뛰어넘으려는 의지’를 심어주었죠. ‘역사학자 백승종’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이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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