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인 식탁 이라영 지음/동녘·1만6000원
한국에서도 제법 인기를 끄는 ‘미국 남부 가정식’은 흑인 여성 노예가 주로 만들던 것이지만, 지금은 백인 남성들에게 주도권이 넘어갔다. 페미니스트들이 채식과 동물권에 관심을 기울이는 건 여성과 자연, 동물이 ‘비인간’으로 착취당한 방식에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예술사회학 연구자 이라영은 <정치적인 식탁>에서 이렇듯 ‘먹는 일’을 가운데 놓고 권력과 차별의 이야기를 종횡무진 펼친다.
먹을 것을 키우고, 만들고, 먹고, 치우는 문제는 지극히 정치적이다.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 가운데 누가 닭 다리를 차지하고 누가 먼저 숟가락을 집어 드는지, 누가 식탁에 초대받고 누가 바깥에서 서성거렸는지, 식당에서 갑질하는 이와 식당에서 거절당한 이들은 누구인지 책은 질문한다. 나아가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여성들이 만들어 나눈 주먹밥, 먹을 게 없어 굶어 죽은 사람들, 음식이 있어도 먹을 시간이 없어 죽은 사람들 이야기까지 점점 넓고 깊게 ‘식탁의 정치성’을 파고들어간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식탁인 예수의 ‘마지막 만찬’엔 빵과 포도주, 남자 제자들이 함께했다. 교회는 예부터 여성에게 공동체 밥상을 차리도록 하면서도 입은 철저히 막았다. 수많은 제자들이 몰려든 마르틴 루터의 식탁을 차린 이는 부인인 카타리나 폰 보라였다. 역사상 첫 ‘목사 사모님’인 셈인데, 그는 수녀 출신으로 상당한 경제활동을 펼친 사업가이기도 했다. 루터는 여성을 꽤 존중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여성은 말을 많이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했다. 성경에서도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린도전서 14:34)고 거듭 강조한다.
정정엽, <식사준비>(162x372cm, oil on canvas, 1995). 일상에서 흔히 만나는 엄마, 할머니 들의 장보는 모습이다. 여성들은 동일한 색으로 그려졌지만, 장바구니 속 식재료에는 다채로운 색을 더해 생동감 있다. 동녘 제공
초대받은 자리가 성찬이 아니면 아무리 귀한 접대라도 사람들은 곧잘 성토를 벌였다. 엘리노어 루스벨트의 ‘퍼스트 키친’은 대공황 시기라서 일부러 간소하게 차림을 하곤 했는데, 백악관에 초대받은 명사들은 음식이 최악이라며 불평을 쏟아냈다. 21세기 한국에서도 여전히 ‘퍼스트 키친’에서 무슨 요리가 만들어지는지 밥상을 진두지휘하는 대통령 부인의 ‘내조력’을 평가하는 이야기들이 끊이지 않는다.
프랜시스 에드윈 호지, <예술클럽의 여성요리사>(1935). 직업인으로서 여성 요리사가 예술에서 재현되는 경우는 적다. 동녘 제공
장소는 권력의 문제와 직결된다. 미국의 초기 여권운동가들은 여성이 혼자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할 권리를 얻으려고 싸움을 벌였다. 21세기 한국 레스토랑에서 브런치 먹는 ‘된장녀’는 서구문화에 찌든 ‘골빈’ 여자로 치부되지만 왁자지껄한 곳에서 감자탕 먹는 여자는 ‘개념녀’로 분할 통치된다. 집 안의 부엌에 여자가 서 있는 것은 자연스럽게 여기지만, 음식점의 조리실은 여성을 ‘셰프’로 인정하는 데 인색하다. 넓디넓은 학교며 회사를 청소하는 노동자들은 좁디좁은 휴게실이나 청소도구함 옆에서 음식을 먹고, 믹스커피를 탄다.
존 홀리필드, <축복>(1999). 아프리카계 미국인 화가 존 홀리필드의 그림에는 가족과 식사하는 장면이 많다. 미국 흑인 가정의 식사는 경건하게 표현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과거 노예들은 주인 마음대로 팔리다보니 ‘가족’과 ‘식사’의 의미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동녘 제공
밥 짓는 여성이라도 그 위치는 단순하지 않다. 미국 백인우월주의 단체 ‘쿠 클랙스 클랜’(KKK)에게 백인 여성들은 의식주를 제공함으로써 흑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데 협력했다. 혼자 사는 아들을 보며 한국의 엄마는 어서 빨리 장가 들어 아내가 차려주는 밥을 먹길 간절히 바란다. 살벌한 고부갈등은 여성 간의 문제 같아도 실은 뒷짐 진 아버지의 문제다. ‘노키즈존’은 아이를 거절했다기보다 사실은 모성 수행을 트집 잡는 것이다.
읽다 보면 군데군데 얼굴이 화끈거리거나 아찔해지기도 한다. 여성은 발효식품부터 과일까지 이해할 수 없이 다양한 먹을거리로 환원된다. 된장, 김치, 스시, 간장, 밀크티, 미국 치즈, 물, 떡, 젖소, 영계, 꽃뱀, 앵두, 복숭아, 꼬막, 골뱅이…. 어찌 이토록 많은지 새삼 놀랍다. 음식에 비유되는 여성은 그 자체로도 ‘먹히는’ 대상이 된다며 책은 매끈한 수면 아래 가라앉은 잔혹한 현실을 들춘다. “밥과 섹스”를 제대로 하지 않은 여자는 남성의 폭력을 ‘이해’하는 배경으로 활용된다. 남편에게 밥을 잘 차려 먹이지 않아 죽임 당한 여자들, 늦게 들어왔다고 오빠에게 매 맞는 여자들, 성폭행 뒤 살해당하고 신체가 훼손되어 내던져진 여자들. 동네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으며 룸살롱과 노래방 여자들의 ‘가성비’를 따지는 평범한 남성들의 킥킥거리는 웃음과 수다를 대비하면서 일상적인 밥상 위에 펼쳐진 더없이 잔혹한 정치를 책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캐서린 라운드트리, <소울푸드 만찬>. 중산층 흑인가정에서 둘러앉는 의미는 더욱 각별했다고 한다. 동녘 제공
전복의 통쾌함과 생각거리를 동시에 던져주는 이라영식 글쓰기는 이번에도 선명하다. “남자는 밖에 나와서 ‘여자 끼고’ 술을 마셔도 근무의 연장이지만, 여자는 밖에서 밥만 먹어도 노는 여자다” “집 안의 여자는 밥과 세트이며 집 밖의 여자는 술과 세트다” “로드킬로 죽은 동물에게는 동정심을 품어도, 먹을 때는 의식적으로 동정심을 거둔다” “밥줄을 쥔 고용주에게 밥은 무기다” 등.
평소 지은이의 글을 즐겨 읽어온 독자들에게도 이번 책만큼은 불편하거나 뼈아프게 다가설 듯싶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려 죽고, 먹을 시간이 없어 못 먹고 죽은 사람들을 추모하는 동시에 자신이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을 전시하는 ‘진보’의 식탁이 처한 부조리를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식탁 위엔 늘 누군가의 죽음이 있고 “내 삶은 누군가의 죽음을 흡수하며 지탱한다”고 지은이는 일깨운다. 남이 해주는 따뜻하고 맛있는 밥은 가장 정치적이다.
가에타노 벨레이, <할머니와 손녀>. 많은 할머니들은 가정에서 유모, 요리사, 산파, 이야기꾼 역할을 해왔다. 동녘
“먹는 입, 말하는 입, 사랑하는 입의 권리를 생각하는 정치적인 식탁은 누구든 환대해야 한다. 배고픔을 해결하는 동물적 존재에서 말하는 권리를 가진 정치적 인간으로, 나아가 타인과 온전히 관계 맺을 수 있는 사랑하는 인간으로 살아갈 권리는 모두에게 있다.” 그리하여 이 책은 ‘환대의 식탁’을 차리기 위한 레시피북이 된다.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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