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찬국 교수(오른쪽)는 1998년 5월 28일 전교조 창립 9돌 기념식에서 참교육상을 받았다. 왼쪽은 당시 김귀식 전교조 위원장이다. 김진수 기자
“그는 채권 장사의 낡은 가죽 가방 같은 것을 들고 다니셨다. 그것은 항상 배부른 가방이었다. 그 속에는 책들이 꽉 차 있었다. 감옥에 가 있는 분들의 책이었다. 가방을 여시면서 책을 즉석에서 팔곤 했다. 누가 감히 그 책을 안 산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는 사명감을 가지고 책을 팔아 의롭고 외로운 고난을 겪고 있는 분들을 돕고 있었다.”
한완상 전 통일부 장관이 소원 김찬국(1927~2009) 교수를 회고하며 쓴 글이다. 고인은 1974년 유신 정권이 조작한 민청학련 사건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구속돼 9개월 옥고를 치렀다. 석방 뒤에는 연세대 신학과 교수직에서 쫓겨났다. 5공 초 5개월가량 교단에 섰으나 다시 해직된 고인은 84년 가을 학기에야 교수 신분을 회복했다. ‘해직 교수’ 김찬국은 자신도 월급이 끊겨 어려운 처지에서 늘 ‘배부른 가방’을 들고 다니며 구속자들과 그 가족을 돕는 데 열심이었단다. 1989년 전교조 결성으로 1500여 명의 교사가 해직됐을 때는 서울지역 해직교사 후원회장을 맡기도 했다. 1987년 연세대생 이한열 열사 장례식 때는 학생들 요청으로 호상을 맡기도 했다.
“선생님은 사랑을 실천하신 분이죠. 학생이 감옥에 잡혀가면 학생을 내놓으라고 표현해 자신이 감옥에 가셨어요. 민족을 사랑해 독재 정권이 민중과 민주주의를 짓밟는 것에 항의하고 정의를 외치셨죠.”
최근 고인의 평전 <민중인권실천신학자-김찬국>을 펴낸 천사무엘 한남대 교수의 말이다. 그는 고인의 연세대 신학과 후배이자 제자이다. 수업은 대학원 시절에 딱 1과목 들었단다. “1984년 봄 연세대 신학과 대학원 3학기 때였죠. 존경하는 교수님인데 수업을 못 듣고 졸업하는 게 안타까워 해직 상태였던 선생님께 부탁해 대학원 구약학 전공자들과 함께 선생님 자택에서 제2이사야 히브리어 원전 수업을 들었어요.”
고인과 같은 구약학 전공자인 저자는 평전에서 스승의 학문 세계 조명도 소홀하지 않았다. “대학 동기이자 선생님 아들인 김은규 성공회대 구약학과 교수가 2년 전 평전 집필을 부탁하더군요. 부친이 구약학 교수였으니 구약학 관점에서 학문적 평가를 엄정하게 해달라고 했죠.”
스승의 학문을 평가하면? “우리나라 구약학 초창기에 기초를 놓았고 무엇보다 연세 신학의 상징이시죠. 신학대마다 학문 조류가 있어요. 종합대인 연세대 신학의 가장 큰 특징은 개방성입니다. 다른 단과대들과도 학문적 교류가 가능할 정도죠. 거기에는 선생님 기여가 큽니다.”
고 김재준, 문익환 목사도 구약학 전공자다. “구약학 전공자들의 사회 비판적 참여가 활발한 편이었죠. 구약학자들은 주로 예언자를 연구합니다. 예언자들은 사회 정의를 외쳤죠. 구약은 또 민족의 자유와 해방 개념도 강해요. 하나님이 이집트 노예 상태에 있는 민족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었잖아요. 이 때문에 일제 말에는 교회나 신학교에서 구약을 못 읽게 했어요. 불온서적이었죠. 구약을 읽은 감리교신학생이 조선총독부 압력으로 퇴학 처분을 받기도 했죠.”
천 교수는 내년 초 출간 예정인 <김찬국 신학사상 논문집> 출판위원장도 맡았다. ‘미소의 예언자’로 불렸던 스승은 자신의 이름으로 이런 농담도 자주 했단다. “김과 찬과 국이 있으니 맛있게 드시오.”
강성만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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