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의 삶, 책들의 운명 수전 올리언 지음, 박우정 옮김/글항아리·1만9000원
새하얗게 불태웠다.
1926년 7월15일 문을 연 미국 로스앤젤레스시 중앙도서관은 1986년 4월29일 오전 11시께부터 오후 6시30분까지 장장 8시간 가까이 불탔다. 불은 보통 붉거나 노랗거나 주황빛을 띠지만 도서관의 불 색깔은 유리처럼 투명했다. “그렇게 완벽하게 연소되기란 거의 불가능해요.” 소방관은 지옥불을 보는 것 같았다며 30년 뒤 이렇게 회상했다. 섭씨 1100도의 맹렬한 화재. “불이 너무 뜨거워 얼음같이 차갑게 느껴졌다”고 했다. 산소통 1400개, 물 300만 갤런 이상… 시가 보유한 소방 인력과 장비 대부분이 불을 끄는 데 쓰였다. 50여명 소방관이 심한 화상, 연기흡입, 호흡곤란으로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당시 도서관을 “부분적으로는 사원, 부분적으로는 성당, 부분적으로는 화재위험지대”라며 화재를 경고했다. 로스앤젤레스 도서관 화재사고 직후 소방대원이 피해상황을 조사하고 있다. 사진은 1986년 5월1일 <로스앤젤레스타임스>에 실린 것이다. 글항아리 제공
새까맣게 사라졌다.
프랑스 유명 판화가 귀스타브 도레의 삽화가 실린 1860년판 <돈키호테>, 베네치아 공화국의 대표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가 1500년대에 쓴 책, 1635년판 커버데일 성경, 미국인이 사랑해 마지않는 패니 파머의 <보스턴 요리학교 요리책> 1896년 초판, 도서관이 보유한 셰익스피어의 모든 작품, 성경과 기독교 교회사에 관한 모든 책, 물에 닿으면 곤죽이 돼버리는 유광지에 인쇄된 예술 간행물과 예술책 전부, 도서관이 소장한 마이크로필름 전체의 4분의 3이 불탔다. 40만권의 책이 잿더미로 변했고 70만권이 훼손되었다.
애타게 기다렸다.
사서들 대부분이 발을 동동 구르며 현장에 남았고 화재 진압 뒤 진입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건물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발목까지 차오른 재와 녹아내린 선반들을 보고 이들은 “케네디 대통령 암살 때처럼” 원통해했지만 신속하게 움직였다. 물이 묻어 곰팡이 포자가 활성화하면 48시간 안에 꽃을 피운다. 이는 직원 250여명이 훼손된 책 70만권을 이틀 안에 몽땅 포장해 냉동고로 옮겨야 한다는 뜻이었다.
놀랍게 모여들었다.
이튿날 아침 2000명의 시민들이 도서관에 나타났다. 자원봉사자들은 연기 자욱한 건물에서 문밖까지 길게 늘어서서 연탄 옮기듯 손에서 손으로 젖고 그을린 책을 날랐다. “이 긴급한 순간은 로스앤젤레스 시민들로 살아 있는 도서관을 이룬 것 같았다. 그토록 짧은 시간에 시민들은 공유된 지식을 보호하고 전달하는 체계, 우리 스스로 지식을 보존하는 체계를 만들었다. 이것이야말로 도서관들이 매일 하는 일이었다.” 책들은 냉장 트럭에 실려 곧바로 섭씨 영하 56도의 식품창고로 옮겨져 냉동 새우와 냉동 브로콜리 사이에 놓였다.
1986년 4월29일 오전부터 불길이 치솟은 도서관은 오후까지 내내 이어졌다. 사진은 오후 1시에 5번가에서 바라본 화재. 소방차들이 동원돼 불을 끄고 있다. 글항아리 제공
다행스럽게 아무도 죽지 않았다.
그래선지 관심도 끌지 못했다. 그주에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났던 게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노심이 완전히 녹아내리고 나서야 인류가 정말 종말을 맞을 것인지 궁금해하던 사람들은 비로소 이 비극에 눈을 돌렸다. 로스앤젤레스시는 19명의 방화 조사관을 고용했다. 방화범으로 지목된 사람은 27살 금발의 청년 해리 피크. 허풍을 떨며 도서관 불길 속에 있었고 자신이 불을 질렀다고 친구들에게 한마디 덧붙인 죄로 붙잡혔다. 어리석고 주목 받기 좋아했던 그는 진술을 거듭 뒤집었다. 엉뚱하게 잡혔다가 풀려났고 소송을 거듭하다 1993년 4월, 34살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에이치아이브이/에이즈(HIV/AIDS) 합병증이었다.
“누가 불을 질렀는지, 혹은 누군가 불을 지른 게 맞는지 의문을 해결하지 못했다. (…) 내가 확실히 아는 사실은 옛날 옛적에 로스앤젤레스 중앙도서관에 끔찍한 화재가 일어났고 어설픈 한 젊은이가 그 사건에 휘말렸다는 것뿐이다.”
1986년 4월29일 해리 피크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방화범으로 체포되었던 그는 재판 내내 진술을 바꾸어 진실을 모호하게 했다. 분명한 건, 그가 주목받길 좋아한다는 것이었고 사람들은 화재에 대해 누군가를 탓하고 싶어했으며 당시엔 해리가 그 대상이었다는 점이다. 글항아리 제공
해리 피크가 죽은 지 반년이 지난 10월3일, 도서관은 다시 문을 열었다. 해동되어 손질한 책들이 돌아왔고, 200만권의 책을 꽂는 파티가 열렸다. 도서관이 다시 열린 날, 1만명 넘는 시민들이 처음 대출증을 만들었다.
지은이 수전 올리언은 아카데미 수상작인 영화 <어댑테이션>의 원작 <난초 도둑>으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뉴요커> 전속 작가다. 지방 신문에 난 1단짜리 기사에 살을 붙여 취재하며 대어를 낚아 올리는 솜씨로 유명하다. 이번에도 질릴 정도로 방대하고 징글징글하게 집요한 취재를 거듭하여 1986년의 비극적인 화재 사건을 재구성한다.
올리언은 <도서관의 삶, 책들의 운명>에서 드라마틱한 화재 사건을 실마리 삼아 ‘살아있는 도서관’의 실체를 캐내는 쪽으로 독자를 유인한다. 결국 다 읽고 나면 이 책이 도서관 화재 사건이 아니라 도서관이라는 어떤 커다란 ‘생물’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는 식이다. 30년 전 화재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가 지은이는 현장 내러티브의 대가답게 그 옛날의 비통한 연기 냄새를 맡아 가며 대도서관 안에 배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채굴한다. 지도와 사진에 일일이 색인작업을 하는 20~30년 된 베테랑 전문 사서를 만나고, 세상의 모든 것을 묻는 이용자들을 응대하는 ‘정보 사서’를 만나고, 헤어진 연인이 좋아하는 책에다 “제니, 어디 있는 거요?”라고 쓴 남자의 흔적을 만나고, 자신의 직무가 마치 심리학자나 성직자같다는 경비원을 만난다. 도서관은 외로운 이들이 서로 연결되려 하는 공간같았다.
로스앤젤레스 중앙도서관을 담은 1935년 엽서. 당시 도서관의 탑은 수천개의 반짝이는 컬러 타일로 덮였고 횃불 든 사람 손 모양 장식이 꼭대기에 놓였다. 담황색 건물 외장엔 조각품들로 장식되었다. 플라톤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이 세상을 밝힌다”, 파스칼의 “생각은 인간이 가진 위대함이다” 알렉산더의 “책은 모두를 초대한다, 누구도 제한하지 않는다” 등을 써넣었다. 건물은 이국적이었고 페르시아나 이집트 건축 같은 느낌을 주었다.
책은 화재사건뿐 아니라 인간이 도서관과 책을 불태워버린 역사, 로스앤젤레스의 시 사서(Librarian) 계보, 1000만달러 모금 운동, 문해반, 제본 기술자, 도서관 건축가 이야기, 시의 정치적 알력까지 촘촘하게 훑는다. 그 중에서도 매력적인 사서들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1880년대 로스앤젤레스 도서관의 여성 사서 메리 존스가 남성이 아니란 이유로 해임 위기에 처하자 1000명의 여성들이 들고 일어나 진정서에 서명하고 행진을 벌인 유명한 사건이 있었다. 자리를 차지한 남자 사서는 기자 출신의 찰스 러미스였다. 그는 방탕하고 낭비벽이 심했지만 도서관을 오늘날의 모습으로 만드는 아이디어를 많이 냈다. 대출기관에 머물던 도서관을 연구센터로 만들고 각종 역사물들을 모으는 컬렉션을 구축하고, 해골과 크로스본(독극물 경고 기호)을 새긴 쇠도장을 만들어 사이비 과학 서적 삽화에 찍기도 했다.
건축가 버트럼 굿휴의 설계로 1926년 문을 연 로스앤젤레스 중앙도서관은 시내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 1986년 불타버린 도서관은 1993년 재개관했다. 출처 로스앤젤레스 공공도서관 누리집
미국의 도서관은 애초 남성 엘리트를 위한 공간이었다. 회비를 받으면서 엄격하고 폐쇄적으로 운영되던 이곳은 점차 모든 이를 위한 민주적 공공자원으로 변모해갔다. 1930년대엔 금 시굴법을 담은 도서가 불티나게 대출되었고 1960년대엔 긍정심리학, 신비학, 정신요법, 노스트라다무스 예언서들이 인기를 끌었다. 1937년 도서관 정보센터에 ‘로미오의 외모’나 ‘눈으로 영생을 볼 수 있는지 여부’ 같은 질문을 해오던 사람들은 1960년대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국가가 연주될 때 일어서야 하는지’, ‘아버지의 묘비명을 어떻게 하면 좋은지’ 등을 물어왔다. 1973년 로스앤젤레스 도서관은 야간 전화 참고 봉사 서비스를 추가해 1년에 약 3만5000건의 문의를 처리했다. 사람들은 낮이고 밤이고 무엇이든 물어댔다.
고풍스러운 분위기로 복원된 도서관 내부. 출처 로스앤젤레스 공공도서관 누리집
하지만 그 덕에 도서관은 사람들에게 한층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다. 2010년의 한 연구에 따르면 1년에 약 3억명의 미국인이 전국의 1만7078개 공공도서관과 이동도서관을 이용했다. 미국 공공도서관은 맥도널드 매장보다 더 많고, 소매 서점보다는 2배나 더 많다. 도서관은 구식이지만 30살 이하의 사람들에게 여전히 인기가 높다고 한다. 인터넷 시대임에도 미국의 대다수 젊은이들은 지금도 여전히 도서관이 가장 정확하고 자세한 정보를 갖고 있다고 여긴다.
지은이는 도서관의 공공성을 여러번 힘주어 말한다. “내 것이 아니지만 내 것처럼 느껴지는, 내가 사랑하는 공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그 공간이 얼마나 멋지고 특별한 느낌인지 들려주는 것,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쓰고 싶었던 이유다. 도서관이 던지는 무언의 약속은 세상의 모든 잘못된 것을 물리치는 것 같다. 내가 여기 있어, 부디 네 이야기를 들려줘, 여기 내 이야기가 있어, 제발 들어줘… 라는 약속.”
도서관의 유령인가? 약간 으스스한 것도 같지만, 역시나 신비롭고 멋진 이야기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