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관 소장 뒤로 그가 수리한 자택 대문이 보인다. 기존 구조물 뒤로 새 구조물을 덧대 새 대문을 만들었다. 김재관 소장 제공
“동료 건축가가 나한테 그래요. 경쟁자가 없다고요. 독점이란 거죠.” 김재관 무회건축연구소장은 집수리하는 국내 유일의 건축가다. 2009년 시작해 그간 15채를 고쳤다. 건축가는 일정 규모 이상의 건축물을 설계하면 직접 시공할 수 없다. 집수리는 그런 제한이 없다. “집을 고치며 비로소 집에 대해 알게 되었죠. 이제야 건축가의 기본을 갖춘 거죠. 앞으로는 자유롭게 건축가로서 내 생각을 펼칠 수 있을 것 같아요.”
18일 서울 종로구 명륜동 산비탈에 자리한 자택에서 김 소장을 만났다. 연구소 사무실로도 쓰는 이 집은 그의 열번 째 수리작이다. 그는 최근 <수리수리 집수리>(문학동네)란 책도 냈다. 집을 고치며 만난 사람 60명의 이야기로 그가 고친 집을 알리는 책이다.
그는 잘 나가던 건축가였다. 97년 제주 강정교회 설계로 이듬해 한국건축문화대상을 받았다. 그 시절 교회 건축에서 볼 수 없었던 노출콘크리트 마감재와 무채색 톤을 쓴 게 파격적이라는 평가를 끌어냈다. 그 뒤로도 제주 충신교회와 부천 성만교회 등 열개 남짓한 교회를 설계했다.
그러다 2008년 서울시가 마련한 ‘건축가에게 말 걸기’ 행사에서 한 참석자로부터 집수리 요청을 받았다. 건축가로서 새로운 삶이 시작된 순간이다. “건축은 설계하면 그 도면이 건축가의 손을 떠납니다. 사정이 생기면 설계도 계속 바뀌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없어 답답했죠.”
서울 구기동이나 부암동, 성북동 등 옛 주택이 많은 동네의 집들을 주로 고쳤다. 아주 낡은 아파트도 한 채 고쳤다. “집수리는 절실한 분들이 맡기죠. 어느 시점까지 감내하다 더는 못 참겠다고 할 때 찾아와요. 너무 춥거나 너무 덥거나 아버지와 집을 합치거나 등등 불가피한 이유가 다 있죠.” 적잖은 비용에도 신축 대신 수리를 택하는 이유는 뭘까? “공사 장비 접근이 어렵다든지 신축을 제한하는 여러 이유가 있어요. 현 법규로는 신축 때 토지 면적이 줄어 경제적 손실이 생기는 경우도 있죠.” 집수리를 하는 이들은 “주택으로 상징되는 강북파”라고도 했다. “아파트는 답답하고 고유의 무엇을 드러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죠. 한 사람이 세 채를 고치기도 했어요. 이사할 때마다 맡겼죠.”
‘집수리 독점’은 10년 내내 변함이 없단다. 그가 터잡은 시장에 진입하는 건축가들이 없어서다. “건축가는 사회적 리더라는 생각이 강해요. 생각으로 건축하지, 짓는 행위는 건축가의 일이 아니라는 거죠. 먼지를 묻히고 여러 민원에 시달리는 게 집수리입니다.” 좀 더 실제적인 이유도 있을 것이란다. “집을 짓는 일머리를 구체적으로 알아야 해요. 내가 기술적으로 정통해야 현장에서 일을 시킬 수 있죠.” 그는 자신을 뒤늦게 해부학을 공부한 의사에 견줬다. “집수리하며 내가 집을 몰랐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집수리에는 반드시 집의 해체가 뒤따릅니다. 해체하면서 애초 설계를 계속 바꿨어요. 해체를 통해 속속들이 집을 공부한 거죠. (집수리) 이전에 내 설계는 몸을 제대로 알지 못한 의사가 수술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집수리의 가장 큰 기쁨은? “설계는 일종의 가정입니다. 희망이고 기대이죠. 제가 생각한 것과 그 결과가 일치할 때 기뻐요.” 예를 하나 들었다. “지붕을 지탱하지 못할 정도로 벽이 낡고 남쪽은 높고, 가파른 산이 가까워 집안이 암흑처럼 어둡고 습기가 눅눅했어요. 고심해 튼튼한 판재를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 지붕을 받치고 지붕 창을 내 빛이 건물 전체로 들어오게 했죠. 기대와 불안이 교차한 생소한 시도였는데 내 생각이 들어맞았어요. 환호했죠.”
개신교회 건축가 이름 날리다
10년 전부터 집수리 뛰어들어
국내 유일 집수리 전문 건축가
“집 해체하며 진짜 집 공부”
최근 ‘수리수리 집수리’ 책도
생생한 사람 이야기로 집 알려
<수리수리 집수리>는 여느 건축 책과 달리 사람 이야기다. 집주인에서 목수나 타일공 등 현장기술자 그리고 골치 아픈 민원 제기자들까지 집수리로 만난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 “출판사도 처음엔 제 의도를 납득하지 못했죠. 제가 원고를 직접 편집해 보내준 뒤에야 알겠다고 하더군요. 건축은 언어적 설명이 굉장히 어려워요. 언어로 공간을 상상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죠. 사람 이야기로 집을 알리자고 생각한 이유입니다. 제 책에 담긴 60명의 삶이 다 집에 묻어 있어요. 목수, 미장이 그분들은 내 생각을 이해해주고 직접 집을 지은 사람들입니다. 이분들을 이야기하면 이들이 짓는 집이 어떨지 상상이 가겠죠. 집은 이렇게 지어진다고 알리고도 싶었어요.”
공부라도 하듯 사람을 골똘히 살펴 풀어내는 인물기는 생생하고 재미도 있다. 페인트칠을 시키자 산 지 얼마 안 된 작업복 버린다며 바로 가버린 멋쟁이 잡부, 수리한 집 때문에 자신의 집이 골목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고 고소한 이웃도 있다. 인물기에 녹아든 세밀한 현장 묘사는 집수리 이해에 도움을 준다.
글을 보면 집수리는 사람과 만나고 사귀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집수리로 사람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나? “더 알면 뭐합니까. 새로 만나면 매번 다 달라요. 만명을 만나도 사람을 보는 눈을 못 가질 겁니다.” 민원에 대처하는 노하우가 있다면? “노하우가 어디 있겠어요. 우리 것을 내주느냐 안 내주느냐의 문제인데요. 민원은 숙명입니다. 토지경계 문제가 가장 커요. 예전에는 측량이 정교하지 않았거든요. 경계를 양보받기 위해 다른 것을 문제 삼는 경우가 많아요.”
그는 고교를 나와 또래보다 늦게 영국의 한 건축대학에 들어가 건축가의 꿈을 이뤘다. 왜 건축이었을까? “고교 시절 친한 친구가 있었어요. 천부적 싸움꾼이고 공부는 꼴등이었죠. 이 친구가 어느 날 밤 저한테 꿈이 뭐냐고 물어요. 자기는 건축가가 꿈이라고요. 그때 기가 막혔죠. 전교 꼴등이 건축가라는 직업을 알고 꿈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요. 어떤 말들은 몸속에 박히듯 들어오기도 합니다. 제가 건축을 생각한 가장 큰 계기이죠.”
많은 건축가의 꿈인 종교 건축의 길을 계속 갈 수 없었던 이유가 궁금했다. “제가 지능이나 상상력, 인문학적 해석 능력이 부족했어요. 또 교회를 지으려면 교회 쪽과 정서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동질성이 있어야 하더군요. 그게 없으면 교회 쪽에서 건축가에게 속마음을 보여주지 않아요. 변호사와 의논할 때도 (의뢰인이) 다 이야기하잖아요. 이게 건축에 영향을 미칩니다. 어느 순간 내가 할 일이 없어져요. 교회 쪽에서 신학적 가치관이 개입해선 안 되는 부분까지 개입하려고도 했죠. 심지어 집을 이루는 요소에 건축가의 관념은 필요 없다고도 했어요.”
그는 초등 6학년 때 서울로 전학 오기 전까지 고향인 충북 옥천군 청성면 장수리 무회(無懷) 마을 시골집에서 살았다. 연구소도 고향 마을 이름을 따 지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산 무회 마을의 집이 제 건축에 많은 영향을 주었죠. 30명 가까이 산 꽤 큰 집이었어요. 외양간 위나 광과 광 사이, 부엌과 벽장 그리고 마루 아래 통로를 쏘다녔어요. 광에 큰 항아리가 있잖아요. 어둠 속에서 항아리를 보면 신비롭고 무서워요. 정적인 경험이죠. 유학자인 조부는 전적으로 내 편이었어요. 어릴 때 할아버지한테 <논어>나 <소학>을 배웠어요. 조부는 글의 뜻을 묻고 제가 답하면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겠다고 답해주셨죠.”
10년 전 그는 집수리 일감이 많이 늘어나리라 점쳤단다. 하지만 이런 예상은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그때가 아파트 인기의 최정점이라고 생각했어요. 인기가 시들해지면 집수리 일감이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인기가 식지 않더군요. 한국에서 집은 부동산과 연결되고 아파트가 바로 부동산의 상징이어서겠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사진 김재관 소장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