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진화하는 페미니즘
권김현영 지음/휴머니스트·1만7000원
지난 20년 동안 한국 사회에 뜨겁게 개입하고 발언해온 페미니스트 연구활동가 권김현영 한국예술종합학교 객원교수가 첫 단독저서를 내놓았다.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진화하는 페미니즘>은 된장녀·개똥녀 담론, 강남역 살인사건, 소수자 이야기, 부모 성을 함께 쓰는 이유, “‘공공의 장난감’이 되라는 공공연한 요구를 받는 젊은 여성 스타들” 이야기, 안희정과 재판부, 장자연과 잃어버린 10년 등 2003년부터 지금까지 그가 쓴 칼럼 가운데 60편을 고르고 다듬어 묶은 것이다. 15년여 시간 동안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페미니즘 이슈를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
그동안 스무 권이 넘는 공저를 냈다. 열렬하게 사유하고 토론하고 공부하고 글을 써왔다는 증거다. 이제는 웃는 여자만을 승인하는 세상 속에서 웃지 않아도 된다는 용기를 얻었고, 웃어도 우습게 보이지 않는 법도 알게 됐다. 23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그는 “20년 만의 단독저서라니 쑥스럽다”면서도 페미니스트로서 목소리를 내고 글 쓰는 삶이 어떠했는지 솔직하게 들려주었다.
첫 단독저서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진화하는 페미니즘>을 쓴 권김현영 한국예술종합학교 객원교수. 그는 “지금도 갱신하고 진화하고 있다”며 “세상과 내가 변화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단독저서 출간을 망설인 것도 사실이에요. 페미니스트로 살면서 목소리를 낸다는 건 인신공격에 계속 노출되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20년 동안 논쟁해왔기 때문에 어떻게 제 말을 채가서 흠잡을지 너무 잘 알고 있거든요.”
익명의 공격을 오래 받았다. 많은 이들이 메일과 문자를 보내 겁박했으며, 집 앞까지 찾아와 위협하는 사람도 있었다. 풍파를 겪으면서도 공적 발언을 멈추지 않았고, 그런 자신을 응원하고자 책을 냈으니 또 하나의 높은 허들을 넘은 셈이다.
“처음엔 비난받을 줄 몰랐어요. (웃음) 동등한 시민으로서 세상이 더 낫게 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뿐이었으니까요. 돌아갈 길도 없으니 응전하는 수밖에 없었죠. 한번 움츠리면 계속 자기 검열하고 위축될 테니까요. 싸움을 걸어오면 반드시 이길 거라고는 생각했습니다. 이길 때까지 싸웠거든요. (웃음) 그래서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이 있을 뿐 진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를 풍미한 ‘영페미’ ‘넷페미’의 대표 주자로서 그는 피시통신 여성모임의 운영진이었고, 여성주의 네트워크 <언니네> 편집팀장을 거쳐 한국성폭력상담소 상근활동가로도 일했다. 여성학을 공부하며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으며 <한겨레> <씨네21> 등 다양한 매체에 칼럼을 기고해왔다. 마이크를 잡아야 할 때 머뭇거리지 않았고, 연대가 필요하다면 달려나갔다.
책은 2003년부터 기고한 글들을 모은 것이지만 오래되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책을 읽다 보면 세상이 변치 않는다고 낙담하는 태도야말로 가부장제와 신자유주의가 촘촘하게 직조한 숙명론적 그물망에 포섭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든다. 그를 만난 이 날 마침 <82년생 김지영>이 극장에 개봉했고, ‘평점 테러’라는 강력한 백래시를 받은 이 영화는 그러나 개봉 첫날 13만8968명을 불러들여 개봉일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맘충’이란 말은 엄마조차 여성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렸어요. 구조적 성차별이 해소되었다는 ‘포스트 페미니즘’ 정서에 맞서 조남주 작가가 한 여성의 인생을 통해 촘촘하게 증거를 수집하여 보란 듯이 증명하는 방식으로 소설을 내놓은 것이라고 봅니다. 그것이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 전체의 반향으로 돌아오면서 이제는 상징적 텍스트가 되었어요.”
여성의 발언장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하다. 100년 전 나혜석의 절망과 몰락은 이혼 때문이 아니라 글 쓸 지면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에 그는 적극 동의했다. 2009년께부터 2015년까지 포스트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각 신문에서 여성 면이 사라지자, 성차별을 말하는 목소리도 실종됐다. “여성 스스로 쓰고 또 쓰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제가 현장에서 여성시민으로서 분노하고, 연구활동가로서 개입하는 원칙이 있습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재판이나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별장 성접대 의혹’처럼 다음 사건의 지표가 될 만한 중요한 사건을 들여다보는 것이죠. 현장에서 지켜보며 연구하고 시민으로서 누구나 수용 가능한 말을 최선을 다해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진화하는 페미니즘> 지은이 권김현영 한국예술종합학교 객원교수.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재판정 방청석에, 대중 강연장에, 3·8 여성대회에, 여성주의 협동조합에, 퀴어 퍼레이드에,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에, 광장에, 학교에… 그는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현장을 천착하는 연구활동가로서 그의 실천은 지적 성실성만큼이나 유명하다. 앎이 갱신되지 않으면 타락한다는 생각에 그는 뼈아프게 보고 읽고 생각하고 느낀다고 했다.
“지금도 갱신하고 진화하고 있지요. 20년 전 나는 부끄러웠지만 지금은 괜찮아졌어, 그래야만 좋아지거든요. 제가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세상과 내가 변한다는 것을 믿어야 할 것 같아요.”
그는 최근 설리(최진리)의 죽음에 낙담하는 학생들을 보며 “그들이 너무 절망하여 입을 닫아버릴까 봐 너무 무섭지만, 실수해도 괜찮다는 것을 경험하고 매일매일 일상을 살아가는 힘을 느끼면서 차츰 나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 페미니스트들이 어떻게 말하고 느끼고 있는지, 중요하게 들어주었으면 합니다. 이 책이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길 바랍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