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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TV의 가출 행복일까 불행일까

등록 2005-12-29 16:47수정 2005-12-30 16:14

지난 11월29일 서울 중구 태평로클럽에서 삼성전자 디엠비 수신 단말기 제품 시연회가 열렸다. 갖가지 화면을 담은 다양한 모양의 제품들이 선을 보이고 있다. 이종근 기자 <A href=\"mailto:root2@hani.co.kr\">root2@hani.co.kr</A>
지난 11월29일 서울 중구 태평로클럽에서 삼성전자 디엠비 수신 단말기 제품 시연회가 열렸다. 갖가지 화면을 담은 다양한 모양의 제품들이 선을 보이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DMB 등장으로 TV는 안방과 거실 박차고 거리로 출근길·화장실·공원… 나홀로 놀이 만사해결 공동체적 가치는 어디에?
커버스토리

텔레비전(TV·티브이)이 가출하려 한다. 이미 가출한 집도 있다. 안방극장으로 불렸던 티브이가 디지털 멀티미디어방송(DMB·디엠비)이라는 이름으로 거리를, 버스를, 공원벤치를 쏘다니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티브이가 거실 공간만 잡아먹는 미운 오리새끼가 될 날도 멀지 않았다고 말한다.

‘티브이 가출 사건’에 대해 나이든 사람일수록 관심이 없다. 나와는 관계없는 집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내 손 안의 티브이’가 됐다며 이를 반긴다.

티브이는 왜 가출을 하게 됐을까?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1970년대만 해도 티브이는 그 집안의 재산목록 가운데 1호급에 들었다. 미제 제니스 티브이나 금성 마크가 찍힌 흑백 티브이를 들여 놓은 집은 그 동네에서 웬만치 사는 집이었다. 킹스컵 축구나 김기수의 권투, 박치기왕 김일 선수가 나오는 프로레슬링 중계가 있는 날에는 온 동네 사람들은 티브이가 있는 집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티브이는 동네의 사랑방 구실을 했다. 그때만 해도 티브이는 한 개인이나 가족을 위한 매체가 아니었었다. 마을 공동체가 함께하는 매체였고 공동체의 문화였다.

80년대 들어 생활이 좀 나아지면서 티브이는 동네를 떠나 가족을 이어주는 매체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컬러 티브이가 나오고 아파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티브이는 거실 한복판을 떠억 차지하게 된다. 거실에서 모인 한 가족은 한국방송의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보며 분단의 아픔을 쏟아져 내리는 눈물로 닦아내야 했다. 또 김수현의 <사랑과 야망>을 보며 가족애를 느끼고, <장희빈>을 맡은 이미숙의 표독스런 연기에 한마디씩 하곤 했다. 당시만 해도 티브이는 밤마다 가족간의 만남을 연결하는 매체였다.


시청자 참여 쉬워 재미 더해

하지만 90년대부터 티브이는 자신의 영역을 좀 더 줄일 수밖에 없었다. 대형 티브이가 등장하면서 방마다 티브이를 따로 설치하는 집이 늘어났다. 컴퓨터를 통해 티브이를 보고, 케이블티브이와 위성티브이까지 나오면서 가족 구성원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자신의 매체로만 봤다. 아버지는 거실에서 스포츠를, 어머니는 안방에서 드라마를, 딸은 자기 방에서 음악 프로그램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이 됐다. 더 이상 티브이는 가족을 묶어주지 못했고, 개인적인 매체로 좀 더 축소됐다.

그러던 티브이가 올해 5월1일 위성 디엠비, 12월1일 지상파 디엠비 출범을 기점으로 안방과 거실을 뛰쳐 나왔다.

디엠비가 거실과 안방에서 티브이를 해방시켰다며 거기에 푹 빠져 있는 한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자. 회사원 이현용(27)씨는 지난 10일 아침 7시에 일어났다. 이날 새벽 독일 라이프치히에서는 월드컵 본선 조추첨 행사가 열렸다. 축구를 좋아하는 그가 이를 놓칠 리 없다. 디엠비 수신기능을 갖춘 개인정보단말기(PDA·피디에이)에서 조추첨 중계방송을 녹화해 두었다. 그는 녹화된 영상을 켜며 출근 준비를 했다.

“오늘은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는 피디에이를 통해 그날 일정을 체크했다. 아침 출근길 자동차에서 디엠비를 볼 수 있는 네비게이션 단말기로 막히는 길은 네비게이션을 이용해 돌아가고, 그래도 길이 막히면 디엠비 방송을 보며 지루함을 달랜다.

업무 중에는 디엠비 폰을 이용해 티브이를 시청하거나 음악을 듣곤 한다. 화장실에서도 볼일 보며 디엠비 방송을 시청한다. 물론 점심시간도 예외일 수는 없다. 식사를 후딱 끝낸 뒤 디엠비 폰을 꺼내두고 방송을 시청한다.

그는 디엠비 방송의 특징으로 짧은 시간을 든다. 이동하는 시간이나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시청할 수 있도록 콘텐츠의 길이를 줄인 ‘1분 드라마’도 인기가 있다. 또 수동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티브이에 견줘 시청자가 쉽게 참여 할 수 있어 거리감이 없다는 점도 든다. 즉석에서 디엠비 폰으로 설문조사에 참여 할 수도 있다. 연예인이 아닌 일반인들이 출연하거나 참여 할 수 있다. “시청자가 함께 방송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 콘텐츠의 재미를 유발 하고 거부감 없이 다가 갈 수 있는 이점이 아닐까 생각해요.”

내년 단말기 본격 유통

그날 그는 동료들과 회식을 했다. 차를 회사에 놓아두고 가야 하는 퇴근길, 버스를 타자마자 그는 호주머니에서 디엠비 폰을 쓱 꺼낸다. 음악 프로그램을 듣다 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디엠비가 없었던 시절, 그는 어떻게 퇴근했는지 떠올려 본다. 대게 꾸벅꾸벅 졸거나, 바깥 풍경을 멍하니 보거나, 하교길 학생들의 수다를 들어야 했다.

디엠비는 티브이가 시간과 공간 제약을 넘어 개인미디어로 탈바꿈하는 것을 보여준다. 앞으로는 인기 드라마를 집에서 보지 않고 연인과 공원벤치에서 앉아 디엠비로 보게 될 날도 올 것이다.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광화문과 시청에서 대형 전광판을 보며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을 외쳤던 많은 이들이 앞으로는 혼자 디엠비 단말기로 경기를 보게 될지 모른다.

이제 가족이라는 정착민적 삶의 중심에 있던 티브이가 유목민적 개인의 상징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긍정적으로 보면, 개인적 자유의 확장이다. 이런 특성으로 디엠비를 활용하는 사람들을 ‘디지털 노마드’라고도 불리운다. 노마드란 몽고의 유목민이나 집시처럼 자유로운 생활을 즐기는 인간 유형을 일컫는다.

‘노마디즘’이라는 개념을 처음 제시했던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는, 1968년 노마드를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로 정의했다. 들뢰즈는 노마드가 기존의 것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면서 늘 영역을 옮겨 다니는 존재로 보았다. 자크 아탈리는 한국에서도 출간된 저서 <21세기 사전>에서 디지털 장비로 무장한 현대인들의 종잡을 수 없는 성향을 디지털 노마드로 정의했다.

21세기형 유목민인 디지털 노마드는 디엠비와 피디에이 등 정보통신 기기를 무장하고 시공간을 넘나드는 생활 패턴을 보인다. 이들은 자유와 개방, 홀가분하고 쾌적한 삶을 추구하면서, 소비 트렌드를 이끌어 왔다.

디엠비 이용자는 얼마쯤 될까. 시장에서의 전망은 밝은 편이다. 그동안 지상파 디엠비 폰을 두고 “유통한다” “못한다”며 줄다리기를 하던 이동 통신사들이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유통에 뛰어들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위성 디엠비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12월말 현재 37만명의 가입자를 확보했고, 위성 디엠비 폰 판매량도 50만대를 넘어섰다. 디엠비 서비스는 이통사의 ‘준’ ‘핌’ 등과 같은 무선 인터넷 서비스를 위협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위성·지상파 디엠비 가입자 수가 오는 2010년 1450만명에 이를 것으로 것으로 내다봤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은 지상파 디엠비 가입자만 2006년 100만명에 이르고 5년 뒤에는 1000만명에 이른다는 전망치를 내놓았다.

하지만 디엠비라는 새로운 미디어가 장밋빛 미래만을 보여주게 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기술이 가져다 주는 편리함은 오히려 공동체적인 가치를 좀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혼자서 티브이를 보고, 혼자서 채팅을 하며, 혼자서 게임을 하는 ‘나홀로 문화’를 낳고, 더 나아가 지독한 개인주의에 빠질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감시와 통제를 받거나 사생활을 노출시킬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개인적인 공간까지 자본과 대중문화가 스며드는 현상이 심화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디지털 노마드 장밋빛?

어떤 이에겐 디엠비는 손 안에서 펼쳐지는 또 하나의 세상이다. 이들은 디엠비를 통해 이 세상은 참으로 다양하고 볼 것과 들을 것이 많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디엠비를 들어 보지 못한 또 다른 이에게는 지하철에서 젊은 녀석들이 큰 휴대폰을 보며 낄낄대거나 히죽대는 웃기는 모습으로만 비쳐질지도 모른다.

디엠비는 그 특성상 젊은층의 문화와 함께 성장해 갈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디엠비에 실리는 콘텐츠는 우리 사회 대중문화의 흐름을 가늠해 보는 잣대가 될 것이다. 이제 ‘손 안의 티브이’가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게 될지, 무엇이 바람직한지를 다시 한번 되짚어 고민해 봐야 할 때다.

마지막으로, 당신은 디엠비를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가정에 있던 티브이가 가출한 매체로 여기고 있나요? 아니면 가정에서 티브이를 해방시킨 매체로 보고 있나요? 같은 디엠비지만 보는 시각에 따라 이해도 달라진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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