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오세영 시인
“일리가 있어요.”
미당 서정주 문학상 폐지 주장에 대한 의견을 구하자 오세영(77) 시인이 한 말이다. “제가 서울대 교수로 있을 때 교육부 국어과 편수관이 물어요. 미당 시를 교과서에 실어야 하냐고요. 이렇게 답했죠. 미당 시는 훌륭하지만 국민의 정체성 확립에 중요한 구실을 하는 교과서에 친일을 하신 분의 시를 싣는 것은 학생 교육에 좋지 않다고요.”
오 시인은 정지용과 박목월의 계보를 잇는 순수서정시인이다. 1965~68년 박목월 시인 추천(<현대문학>)으로 등단해 그간 시집 25권을 냈다. 2007년 서울대 국문학과에서 퇴임할 때까지 35년 동안 대학 강단에서 현대문학을 가르쳤다.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인 그의 시집은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체코 스페인 프랑스에서 번역 출판됐다.
그가 보기에 미당은 정지용과 함께 한국 최고 시인이다. “소월의 시는 영혼의 울림이 있어요. 직관적이죠. 그래서 시를 배우는 입장에서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아요. 하지만 미당과 정지용 시는 상상력이 넓고 깊어요. 젊은 시인들이 훈련할 수 있는 좋은 모델이죠.”
시인은 최근 자전적 에세이 <오세영 문학 자전-정좌>(인북스)를 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문학에 영향을 미친 인물로 미당을 고교 시절 은사와 목월에 이어 세번째로 놓았다. 하지만 이렇게도 썼다. “역시 문학보다는 인생이었다. (중략) 아무리 그래도 서정주 선생만큼은 그리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지난 25일 서울 방배역 근처 카페에서 만난 시인에게 그 뜻을 물었다.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미당만큼은 친일을 하지 않았어야 한다는 말이죠. 각 시대마다 보편적인 가치가 있어요. 문학보다 중요한 것이죠. 예컨대 밥을 굶거나 노예로 산다면 문학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일제 때는 주권과 언어를 빼앗겼는데 문학이 어디 있어요. 일본의 노예 상태에서 문학을 최고가치라고 할 순 없어요. 시도 당연히 맞서 싸워야죠. 70, 80년대도 민주주의를 위해 ‘문학의 정치도구화’가 필요한 시기였죠.”
하지만 그는 그 시절에도 순수서정시를 썼다. “70년대에 김지하처럼 써야 했죠. 저는 용기가 없어 그렇게 못했어요. 부끄럽게 생각해요. 어설피 민중시 조류에 휩쓸리기보다는 차라리 문학(언어)이라도 순수하게 지키자는 생각이었죠.” 자신을 ‘창비와 문지 양대 문단 권력의 왕따’라고도 썼다. 사회성이 부족한 성격 문제도 있지만 오해 탓도 있단다. “두 문학지 중 그간 창비로부터 딱 한 번 시 청탁을 받았어요. 문지는 개인적 문제가 있었지만 창비는 저를 순수문학파로 내몰아 그들이 지향하려 했던 참여 혹은 민중문학 이념의 반동 세력으로 규정했죠. 오해가 있었어요. 저는 문학의 자율성과 창작의 자유를 옹호하는 순수문학파인데 마치 문학의 정치참여를 절대 거부하는 문학이라고 본 거죠. 고은 같은 분은 시는 원래 정치수단이라고 했죠. 저는 학자로서 그렇지 않다고 했어요. 프랑스 작가 샤르트르도 산문과 달리 시로는 참여문학을 할 수 없다고 했어요. 시는 의미 전달이 아니라 존재의 언어이기 때문이죠. 진흙으로 막사기도 만들 수 있고 청자기도 만들 수 있죠. 막사기가 없으면 청자기로 밥을 먹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청자기가 원래 밥먹는 그릇이었다고 하지는 말자는 게 제 주장이었죠.”
그는 책에서 70, 80년대 상당수 민중시를 두고 ‘시류에 영합한 유행 풍조’라고 날을 세웠다. “그 시절 민중시 중 살아남은 시들이 거의 없어요. (사회주의 문인 단체) 카프도 1927년부터 45년까지 우리 문단을 주도했지만 지금 남은 작품이 거의 없어요.”
시인은 스스로 허무주의자라고 했다. “허무주의여서 시를 쓴다”고도 했다. 이어 가정사를 꺼냈다. 그는 지난해 금강산에서 8살 때 헤어진 사촌 누이를 만났다. “제가 모친 배 속에 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태생적으로 기구한 운명이죠. 허약했던 모친은 제가 결혼하기도 전에 돌아가셨어요. 전남 장성 외가에서 자랐는데 외조부는 한국 전쟁 때 거물급 좌익 인사였던 이모부 때문에 국군 총에 맞아 돌아가셨어요. 외가 식구들은 재산도 몰수당해 떠도는 신세가 되었죠. 이모부는 그때 체포돼 남한에서 오랜 수형 생활을 했고 남편의 행방을 모르던 이모는 딸과 함께 북으로 가셨어요. 그 이모 딸을 작년에 만났어요.”
28살 때 모친을 잃고 우울증 증세가 나타나 1년 가까이 치료를 받았단다. “병석의 어머니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다는 가책과 고통이 컸어요. 모친을 보낸 뒤 제 시도 이전의 아방가르드적 실험에서 인생론적 문제 탐구로 변화하게 되었죠.”
책에는 전주 기전여고 제자인 고 최명희 작가를 비롯해 김지하·김춘수 시인과 김현 평론가 등 문단과 교단에서 만난 이들과의 일화가 많다. 80년대에는 미당 시 ‘자화상’을 서울대 강의실에서 가르치다 ‘왜 이 시를 배워야 하느냐’는 한 학생의 항변에 직면했단다. 학생의 논변에 교수인 그가 머뭇거리자 다른 수강생들이 우레 같은 박수를 치기도 했단다. 익명으로 쓰기도 했지만 그의 회고를 불편하게 생각할 이들도 있을 것 같다. “후세를 위해 시대의 진실을 남기는 게 필요하다고 봤어요.”
68년 등단해 시집 25권 ‘순수서정시인’
서울대 등서 35년 현대문학 강의
최근 문학 인생 회고 에세이집
“역시 문학보다는 인생이죠
미당만큼은 친일하지 않았어야”
겨울부터 여행시집 시리즈 출간
그는 시집 외에 문학 학술서도 24권을 썼다. 시와 학문의 병행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고 하자 이렇게 답했다. “서울대 국문학과에 가니 문학 창작을 금기시하더군요. 이 학과의 모태가 경성제국대 법문학부 문과 조선어전공입니다. 그런 연유로 국어학과 고전문학만 인정하고 현대문학은 학문적 관심 밖이었어요. 현대문학은 60년대 중반에야 학문적으로 인정을 받아요. 미 하버드나 예일대를 보면 영어학 전공이 영문학이 아니라 언어학과 소속입니다. 이게 세계 대학의 보편 규범이죠. 우리도 국어국문학과 전공 분류 개선이 필요해요. 학문을 하다 시를 쓰려면 벽을 건너야 했죠.” 어떻게? “온종일 무념무상으로 티브이를 보거나 하루나 이틀 정신을 멍하게 비우기도 했어요. 정신을 잃을 정도로 폭음하기도 했고 산사에 들어가 몇주씩 푹 묵기도 했어요.”
시는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만났단다. 보강으로 들어온 선생님이 한 시간 내내 소월의 시를 읽어주었다. 시인은 그 체험을 ‘마약처럼 감각으로 와닿는 그 우수의 세계’라고 기억했다. “시인들은 사실 다 마약환자입니다. 시쓰기가 고통스럽지만 버리지 못해요. 그만큼 충족감이 있죠. 시는 영원으로 가는 창문입니다. 삶의 완성에 대한 체험을 느끼고 싶은 열망이 시쓰기의 가장 큰 원동력이죠.”
시가 있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의 차이는? “시는 인간답게 사는 것에 대한 체험과 동경입니다. 인간은 먹고사는 것에 만족하지 않아요. 가치를 추구하죠. 시는 어떻게 사는 게 가장 인간답고, 영원의 삶이고 행복의 삶인지 그런 문제에 접근하죠. 시를 쓰며 그런 삶은 아니더라도 비슷한 체험은 할 수 있겠죠.”
인터뷰 말미에 요즘 대표적인 민중시인인 송경동 작가가 화제에 올랐다. “송경동 시인의 시가 좋아요. 미적인 형상화가 되어 있죠. 이재무, 손택수, 공광규, 문태준, 박형준의 시도 좋아합니다.”
지난 몇 년 그는 여행시 창작에 힘을 쏟고 있다. 이번 겨울에는 실크로드 여행 경험을 토대로 이 지역 문명사를 서정적으로 풀어낸 여행시집을 펴낼 참이다. 지난해 한 달 동안 실크로드 동쪽 종착지인 코카서스 3국(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젠)을 배낭여행했단다. 안데스와 아프리카 여행시집도 순차적으로 낼 계획이다. “정년 뒤 세상의 궁벽진 곳을 찾아 배낭여행을 많이 했어요. 기왕에 이 세상에 왔으니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보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이죠. 내년에는 북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지대를 다녀올 생각입니다. 미당도 돌아가시기 전에 여행시를 많이 썼더군요. 그 시를 보니 대부분 여행하다 즐거운 내용이었어요. 저는 문명사 탐구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배낭여행은 인터넷에서 모인 일행과 함께 한단다. “지역 전문가가 한 명 동행합니다. 현지에서는 하루나 이틀씩 자유롭게 움직이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오세영 시인. 강성만 선임기자
오세영 시인이 최근 펴낸 문학 자전 표지.
오세영 시인이 중남미 쿠바 여행을 하며 산 모자를 쓰고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연재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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