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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복화술로서의 소설

등록 2019-11-08 05:59수정 2019-11-08 20:30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

이장욱 지음/문학동네·1만4000원

이장욱(사진)의 세번째 소설집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에는 아홉 단편이 실렸다. 한 줄로 꿰기 어렵도록 주제와 소재가 제각각인 가운데, 예측할 수 없는 전개와 허를 찌르는 결말이라는 특징을 공유하는 작품들이다.

표제작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의 화자인 시인 ‘나’는 어느날 자신의 시를 게시한 블로그를 발견한다. 블로그 주인인 여성은 그리 잘 알려진 시인도 아닌 나의 시가 잡지에 발표될 때마다 꼬박꼬박 업로드하고 그에 대한 감상을 덧붙여 놓는다. 블로그 글을 다 읽어 본 나는 “그녀와 내가 아주 깊고 은밀한 운명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시인과 독자 사이의 아름다운 교감으로 이야기가 그쳤으면 좋았겠지만, 사태는 뜻밖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어느 날부터인가 나의 시가 조금씩 수정된 채 블로그에 올라가는데, 심지어는 시인 자신조차 “원래의 내 시보다 그녀가 옮겨 적은 내 시에 더 호감을” 느낄 만큼 개작 솜씨는 훌륭하다. 블로거가 시인의 작품을 손보는 정도는 갈수록 심해져서 “이제 거의 나의 시라고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급기야는 내가 발표한 적이 없는 시가 버젓이 내 이름을 달고 블로그에 올라가기까지 한다. 블로거가 누구인지, 왜 그런 행위를 하는지는 끝내 확인되지 않는데, 그 이후의 상황 전개는 더더욱 예측 불허에 점입가경이다.

‘최저임금의 결정’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숨진 젊은 여성 희수를 중심에 놓고 전개된다. 희수의 죽음이 점주 때문이라 생각하는 남자친구가 복수를 위해 새벽의 편의점을 찾는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사태가 그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게다가 소설 말미에 가면 극노인과 대여섯 살 된 아이가 차례로 담배를 사러 새벽 편의점을 찾는데, “아이의 입이 다시 천천히 열렸다”는 마지막 문장은 모호한 긴장감을 남기며 돌연 소설의 문을 닫는다.

치매 노인을 화자로 삼은 ‘양구에는 돼지코’, 한물간 소설가이며 암환자인데다 재혼했던 여성과 사별한 남자를 주인공 삼은 ‘눈먼 윌리 맥텔’에서는 질병과 죽음을 바라보는 시야가 깊고, ‘스텔라를 타는 구남과 여’에서는 이십대 동거 커플의 일상과 미묘한 갈등 묘사가 실감난다. 이밖에도 중학생 키보드 워리어(‘행자가 사라졌다’), 자살 중독에 편집광인 은퇴자(‘낙천성 연습’) 등 다채로운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런 점에서 “다른 영혼의 목소리를 빌려오는 것”(‘복화술사’)이라는 복화술의 정의를 고스란히 이장욱의 소설에 적용해도 좋겠다 싶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문학동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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