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꿀벌에게 ‘자기 돌봄’ 배운 한 여성 이야기

등록 2019-11-08 06:01수정 2019-11-08 20:29

부모의 이혼과 엄마의 방임, 할머니의 냉대 속 자란 아이
양봉가 의붓 할아버지와 꿀벌에게 생의 진리 배우며 치유

할아버지와 꿀벌과 나

메러디스 메이 지음, 김보람 옮김/흐름출판·1만5000원

<할아버지와 꿀벌과 나>는 미국의 저널리스트 겸 작가 메러디스 메이가 자신의 유년 시절을 그린 회고록이다. 불화를 겪던 부모는 그녀가 다섯 번째 생일을 맞이하기 전 이혼을 하고, 어린 메러디스는 엄마의 손에 이끌려 동생과 함께 캘리포니아의 외가에서 살아가게 된다. 아이는 아빠와 헤어져, 살던 집을 떠나오는 일이 “그저 잠시 지나가는 일이길” 바라지만 앞날은 여린 마음이 기대한 것처럼 펼쳐지진 않는다. 세 식구가 기거할 외가의 한 방에 들어서며 아이는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인식한다. “방 안으로 한 발 내딛자마자 내 세상이 잔뜩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고.

그림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그림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엄마가 양육의 책임을 내던지고 침대 속에 파묻혀버리자 남매의 양육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로 대체된다. 아이가 마주한 투박한 환경은 벌에 쏘였을 때의 얼얼한 통증처럼 성장 과정 내내 아프게 그려진다. 부모의 부재로 생긴 촘촘한 구멍들은 아이가 대학에 들어가게 돼 자립할 때까지 그대로 벌어진 채 드러나 있다. 엄마의 역할을 대신해주는 할머니는 때때로 야멸차고, 아이가 느끼는 상실감이 커질수록 벌의 언어와 몸짓을 이해하는 ‘양봉가’ 할아버지가 정서적 공간을 메운다. 벌을 무서워하던 메러디스에게 벌에게도 감정이 있고, 사람처럼 가족들의 품 안에서 사랑받으며 안정감을 느끼며 산다는 걸 알려준 할아버지 덕분에 “상자처럼 작게만 느껴졌던 우리 방의 경계가 아주 약간 넓어졌다”며 아이는 세상을 향한 시야를 조금씩 넓혀간다.

힘든 시간을 겪을 때마다 꿀벌의 생태를 일러주며 곁에 머무는 할아버지가 ‘친’할아버지가 아닌 ‘의붓’할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그 의미를 묻자 할아버지는 아이의 마음을 읽고서 답해준다. “의붓-이라는 건, 이 경우에 그저 할아버지가 한 명 넘게 있는 행운아라는 뜻이지.” 갑작스레 빗방울이 떨어지자 수백 마리의 ‘유모벌’이 벌집판에 서로 날개를 맞물린 채 알이 비를 맞지 않도록 완벽히 보호하는 정연한 세계를 목격하며 메러디스는 대리 부모가 되어 자신을 보듬어준 할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

꿀벌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아이의 시선엔 회복되지 않는 가정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겨 있기도 하다. “벌들을 보고 있으면 모성이란 아주 작은 생명체에게도 적용되는 당연한 자연계의 일부로 여겨졌고, 어쩌면 우리 엄마도 언젠가 다시 내게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꿈틀거렸다.” “벌집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하나의 가정이었다.” 또 한편, “꿀벌들은 내게 나 자신을 돌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주었다”며 역할을 다하지 않는 부모를 원망하는 대신 자신을 추스르며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기도 한다. “좌절은 자연의 섭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택한다.

마음에 무수한 생채기를 남긴 엄마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는 순간은 대학 입학을 앞두고 집을 떠나기 직전에야 맞는다. 친아버지에게서 학대를 받은 과거를 떨치지 못한 엄마가 자기연민에서 늘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게 되지만 관계의 변화에까지 이르진 못한다. 벌떼 사이에서 차례로 제 소임을 다하다 드디어 먼 곳의 밀원지를 찾아 날아가는 ‘외역벌’처럼 더 큰 세상에 나아갈 만큼 성장한 소녀가 되었을 뿐.

부르튼 입술에 바르는 꿀처럼, 저자의 유년기엔 할아버지와 그가 돌본 벌들이 모든 노력을 쏟아 만들어낸 호박 빛 달콤한 결정체가 스며들어 있다. 책장을 덮을 땐 아련한 통증을 아물게 하는 꿀 향기가 입가에 감돌 듯하다.

강경은 기자 free1925@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친자 인정한 정우성…29일 청룡영화제 예정대로 참석 1.

친자 인정한 정우성…29일 청룡영화제 예정대로 참석

“어무이 부르면, 오이야 오이야…” 국어 교과서 실리는 할머니 시 2.

“어무이 부르면, 오이야 오이야…” 국어 교과서 실리는 할머니 시

네이버웹툰 ‘이세계 퐁퐁남’ 비공개 처리…“여성 혐오” 신고 누적에 3.

네이버웹툰 ‘이세계 퐁퐁남’ 비공개 처리…“여성 혐오” 신고 누적에

‘가왕’은 현재형…늦가을 밤 뜨겁게 달군 조용필의 명품 무대 4.

‘가왕’은 현재형…늦가을 밤 뜨겁게 달군 조용필의 명품 무대

로제 “세상에 인정받으려 애쓰는 모습에 지쳐…나를 찾으려 한다” 5.

로제 “세상에 인정받으려 애쓰는 모습에 지쳐…나를 찾으려 한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