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가 뽑은 2019 올해의 책-국내서]
일러스트 백승영
지난해 봄 한반도에 불어온 훈풍은 느닷없이 냉기로 바뀌었다. 3·1운동 100년을 맞은 2019년 한국 사회는 그 기억을 온전히 복원하지 못했고 사람들은 점점 새로운 사회의 희망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서초동과 광화문에서 이어진 ‘광장의 정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들은 술잔을 기울였다. <한겨레>는 연말을 맞아 올해의 국내서 10권, 번역서 10권을 꼽았다. 서영인 문학평론가, 이권우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정인경 과학저술가, 정희진 여성학연구자, 홍순철 비시에이전시 대표에게 추천을 받아 <한겨레> 책지성팀이 선정했다.
권보드래 지음/돌베개·2만7000원 곳곳에서 100만명이 뛰쳐나와 만세를 부른 사건, 3·1운동. 저자는 묻는다. “조야하면서 장엄하고, 난폭하면서 고귀하고, 무지하면서 드높은, 이들은 누구인가?” 당시 경찰 신문조서를 바탕으로 대규모 시위의 원인, 세계사적 맥락, 이후 사회변동에 끼친 영향 등을 탐구해나간다. 비록 독립은 실패했지만, 시위의 경험은 기생·백정 등 ‘낮은 사람’들의 각성으로 이어졌다. 3·1운동 100돌을 맞은 올해, 이 책이 단연 빛나는 것은 미시사와 거시사를 엮어 ‘보통 사람들의 역사’를 완성했기 때문이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김영하 지음/문학동네·1만3500원 올해 독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책. 50만부 가까이 팔렸다. 출판사 마케팅, 저자의 이름값, 그리고 순수한 재미라는 베스트셀러의 3대 조건을 조화롭게 갖췄다. 중국 입국을 거부당한 경험부터 시작해 ‘여행의 의미’를 열쇳말 삼아 자신과 글쓰기,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사유하는 9편의 에세이를 실었다.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서 여행을 좋아한다는 작가의 고백은, 일상에 묶인 이들에게 미지의 장소로 떠나는 꿈을 마구 자극한다. 이주현 기자
정종현 지음/휴머니스트·2만원 한국 근대를 일군 엘리트의 실체를 규명한 노작. 일본 제국대학에서 유학한 조선인들의 삶을 추적했다. 가난한 고학생도 있었지만, 나라를 팔아먹은 ‘귀족’과 명망가, 지주와 식민지 부르주아의 후예가 다수였다. 제국대학 졸업장을 거머쥔 이들 대다수는 관료·교원을 비롯해 군수, 판검사 등 식민 시스템을 지탱하는 도구로 일했으며, 해방 이후에도 이들이 구축한 상층의 세계는 견고하게 유지됐다. 오늘날 법조계와 교육·학술 엘리트의 뿌리는 모두 제국대학 유학생에 이른다는 점을 밝혔다. 이주현 기자
김지혜 지음/창비·1만5000원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 “여자치고 잘 하네” 같은 ‘선량한’ 사람들의 차별적인 태도를 짚은 책. 웃자고 한 이야기 속에 숨은 위계 정치의 맥락을 정확하게 논증하고 선량한 마음만으로 평등을 이룰 수 없다고 강조한다. 차별당한 사람은 많은데 차별한 사람은 없는 한국 사회에 던지는 인권 현장 보고서이면서 차별에 대응하는 시민의 자세를 배울 수 있는 참고서다. 강릉원주대에서 소수자, 인권, 차별을 가르치는 김지혜 교수는 올해 출판계의 ‘발견’.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이민경 지음/한겨레출판·1만6000원 2019년 페미니즘의 가장 뜨거운 화두였던 ‘탈코르셋’의 기록이다. ‘탈코’는 사회구조적인 여성성 강요에 저항하려는 목적으로 화장, 성형, 긴 머리 등 꾸밈을 전면 부정하는 운동을 가리킨다. 페미니스트 액티비스트이자 번역·저술가로 활발히 활동중인 이민경 작가는 1년여 동안 ‘탈코’를 실천해온 여성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이 운동이 실제보다 평가절하되고 있다는 점, 2000억원 규모의 국내 영유아화장품 시장의 문제 등을 낱낱이 밝혔다. 이유진 기자
이철승 지음/문학과지성사·1만7000원 올 한해 격렬했던 ‘불평등’ 담론의 최전선엔 이 책이 있었다. 도서평론가 이권우의 지적처럼, 이 책으로 인해 세대적 불평등을 건너 뛰고선 더 이상 공정과 정의를 논할 수 없게 됐다. 저자는 실증적 분석을 통해 386세대가 한국의 정치·경제·시민사회 권력을 장악했으며, 세대독점으로 인해 청년 세대와 여성들의 일자리 문제가 악화됐다고 말한다. 세대론에 함몰되면 계급과 성차별의 이슈가 사라진다는 반론과, 또 이에 대한 재반론이 잇따르면서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이주현 기자
김초엽 지음/허블·1만4000원 과학 분야 석사학위를 받은 신예 작가 김초엽의 첫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올해 뚜렷해진 에스에프 바람을 타고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과학적 지식을 유감없이 발휘한 수록작들에서 작가는 인간과 삶에 관해 질문을 던지며 사고 실험을 수행한다. 김초엽의 에스에프는 또 역시 최근 문학의 뚜렷한 흐름인 페미니즘을 적극 표방한다는 점에서도 눈길을 끈다. 주요 우주비행사나 과학자가 여성으로 설정된 것은 그 한 예일 뿐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박상영 지음/창비·1만4000원 성소수자의 사랑이라면 어쩐지 음울하고 고통스러울 것만 같다. 그런 편견을 박상영은 여지없이 깨뜨린다. 두 번째 소설집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그는 퀴어의 연애와 실연을 자못 유머러스하게 그린다. 미 제국주의를 증오하는 운동권 퀴어 ‘아재’ 그리고 아들의 성정체성을 사갈시하는 기독교도 엄마가 한쪽에 있는가 하면, 그런 퀴어 남성과 스스럼없이 동거하는 대학 여자 동기가 다른 한쪽에서 균형을 잡아 주는 느낌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장강명 지음/민음사·1만4000원 해고와 파업, 철거, 취업, 아르바이트, 영세 자영업 등 “한낮의 노동과 경제 문제들”(‘작가의 말’)을 다룬 연작 단편 10편이 ‘자르기’ ‘싸우기 ‘버티기’ 세 묶음으로 나뉘어 묶였다. 기자 출신답게 작가는 현실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들여다본다. 쉽사리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으려 하면서, 일이 축복과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과 투쟁의 대상이 되어 버린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차분하게 따져 보자고 독자에게 제안한다. 최재봉 선임기자
주명철 지음/여문책·각 권 2만원 드디어 10년의 대장정이 마무리됐다. 1789년 루이 16세의 전국신분회 소집부터 1794년 로베스피에르 처형까지를 10권에 꾹꾹 눌러 담았다. 분량과 무게감이 만만치 않지만, 저자가 프랑스 유학 시절부터 모아둔 1차 자료 덕분에 마치 프랑스 혁명을 경험한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듯 생생하다. 혁명과 반동의 물결이 교차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역사의 굴곡성과 장기성을 곱씹게 된다. 촛불혁명의 환희와 개혁의 어려움, 구세력의 생존력을 절감하는 한국인들에게 주는 함의가 각별하다. 이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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