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이 줄고 있다는 종이책의 위기감 속에도 종이 잡지는 꾸준히 탄생하고 있다. <샘터> <인물과사상> 같은 오랜 연륜의 잡지가 지난해 위기를 겪거나 발행을 중단한 반면 강한 개성과 세련된 디자인을 앞세운 ‘신생 잡지’들은 젊은 세대의 폭넓은 지지를 받으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2019년 10월25일치 ‘책&생각’ 참고) 지난 14일 첫 호를 낸 ‘인문잡지’ <한편>도 이런 시대 분위기에 틈입했다. 이 잡지는 출간 1주일 만에 초판 3000부가 매진되어 증쇄에 들어갔다. 정기구독자는 같은 기간 1000명을 넘었다.
매년 1·5·9월 세 차례 발간하는 200여쪽의 얇은 책에 사회학, 정치학, 인구학, 철학 등 여러 분과에서 활동하는 연구자들의 글을 아울렀다. 신새벽 편집자는 들어가는 글에서 “사르트르와 같은 권위있는 지식인은 이제 나오지 않는다”며 “한명의 사상가에 기대는 대신 여러 분과 학문의 연구를 연결할 때 인문과학의 위기에 대처할 수 있다”는 전망을 가져왔다. 매호 특정 주제를 깊이 파고드는 ‘테마형’인 잡지 첫 주제는 ‘세대’이고, 열편 중 서너편의 글이 ‘페미니즘’과 교차한다. 이 시대 가장 뜨거운 두 가지의 주제를 꿰었다는 건 상투적인 선택 같기도 하지만 대중성과 깊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자신감의 표현으로도 읽힌다. 진부할지, 진보적일지 외줄 타기를 감행하기로 결정하고 기꺼이 응전한 편집자들을 28일 오후 3시 서울 강남구 강남출판문화센터에서 만났다.
3명의 젊은 출판편집자들은 2019년 3월 비문학 잡지를 만들기로 결정하고 ‘태스크포스팀’에 합류했다. 철학 전공자로 <사서> <한국 산문선> 등 고전과 <나와 타자들> <자아의 초월성> 같은 인문서를 주로 만들어온 신새벽(32·논픽션팀 과장) 편집자와 불문학과 철학을 전공하고 외국 문학을 편집해온 허주미(37·문학3팀 팀장) 편집자, 학부와 대학원에서 중국 현대문학을 공부한 이한솔(31·인문교양팀) 편집자는 평소에도 ‘케미’를 자랑하는 3인방이었다.
“창간호라 독자들의 반응을 기대하긴 했지만 예상보다 호응이 더 빨랐다”고 신 편집자는 말했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보다는 젊은이들이 주로 쓰는 인스타그램에 인증샷이 우수수 올라왔다. ‘책보다 짧고 논문보다 쉬운 한편’의 글을 읽는다는 컨셉에 호감을 느낀 독자들이 많았다.
“한 편당 200자 원고지 30장에 해당하는 짤막한 글인지라 독자들의 반응은 두 가지인데, ‘몰입할 만하면 끝난다’는 전통적 인문서 독자들의 반응과 ‘짧은 덕에 끝까지 읽을 수 있어 좋다’는 젊은 독자들의 반응이 상반되어 흥미로웠습니다.”(이한솔)
이들이 겨냥한 건 물론 후자 쪽이다. “새로운 인문독자 창출”(허주미)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출판사 통계를 보면, 정기구독자는 30대 신청자가 41%로 가장 많았고 20대 신청자가 34%로 뒤를 이었다. 40대는 14%에 그쳤다. 20~30대 독자들이 75%에 이른다. “무엇보다 골치 아팠던 것이 잡지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일이었어요. ‘인문잡지’라는 성격을 만들어 놓고 보면 쉬운데, 처음에는 철학이냐 인문예술이냐 혼란스러웠어요. ‘인문잡지’로 정한 다음엔 제호 정하기가 또 난관이었죠. 백 가지 후보군 가운데 한국어 제호를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신새벽)
민음사의 격월간 문학잡지 <릿터>와 비평 무크지 <크릿터> 같은 ‘선배’ 문예지들이 있었거니와, 이 잡지도 외국어 제호를 달 뻔했다. “<줄리>(Jelis, 나는 읽는다)라는 프랑스어 제호도 레트로한 감각에, 젊은 독자들을 생각할 때 캐릭터화할 수 있는 장점”(이한솔)이 있었지만, 편집자들은 우리말을 선택했다. 책 외양을 꾸밀 때도 ‘최소의 디자인, 최대의 의미’를 추구한 결과, 크기는 작아지고 표지엔 주제를 나타내는 글자만 남겼다. 유진아 디자이너는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의 조건>으로 2018년 <한겨레> ‘책과생각’이 ‘올해의 북디자인’으로 선정한 실력자. 매호 아름다운 한글폰트로 주제를 변주한다.
29일 저녁 연세대 연희관에서 ‘세대와 젠더’라는 주제로 연 공개세미나에서 이민경 작가(왼쪽)와 김영미 연세대 교수가 대담하고 있다. 민음사 제공
가장 큰 특징은 ‘공동연구’라는 것이다. 필자들이 함께 모여 서로의 생각을 배우고 교감하는 가운데 수없이 원고를 고쳐 썼다. 글을 청탁할 때부터 필자 안배에 주의를 기울여 성별, 지역, 경력을 고르게 하려 했다. 그 결과 여성 5명에 남성 5명, 대학 강단의 기성세대 교수들과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젊은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두루 함께할 수 있었다. 신 편집자는 “앞으로도 직업인이나 활동가 등 학계에 몸담지 않는 이들을 포함해 특정 주제에 대해 누구라도 쓸 수 있도록 판을 넓히고 싶다”고 말했다. 전문 연구자들의 협업은 아카데미 내 지식생산 시스템을 존중하되 바깥에서 벽을 허물고 협력하면서 지속가능한 지식생태계 속으로 독자를 초대하려는 노력이다.
초판 3000부 1주일 만에 매진된 민음사 인문잡지 <한편> 만든 민음사 편집부 허주미 팀장(오른쪽부터)과 신새벽, 이한솔 편집자.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비교문학 협동과정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학생이기도 한 허주미 편집자는 “<릿터> <악스트> <문학3> 같은 문예지는 많지만 인문학, 논픽션 등 전문 연구자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을 수 있는 매체가 부족했다”며 “문학 독자와 인문 독자의 거리감을 좁히고 싶다”고 말했다. 창간호 기획에서 베트남, 중국 등 동아시아 청년세대 담론을 포함하도록 힘썼던 이한솔 편집자는 2호에서도 아시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예정이다. 그는 “서유럽과 영미권 위주의 왜곡된 렌즈를 채워주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구실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편>은 매호 책을 내며 독자 대상 공개세미나를 기획한다. 혼자 읽고 리뷰를 쓰는 데 머물지 않고 서로 만나 이야기하며 담론장을 확산시키려는 계획인 셈이다. 교양과 문학과 학술 사이에서 출판편집자들은 무엇을 꿈꿀까. “하인리히 하이네는 자신이 학자가 아니고 대중이며 수많은 대중과 함께 ‘그들 지혜의 현관문 앞에 서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문앞에 서 있을 때 자신에게 다가온 철학을 식자공에게 넘기고, 이를 인쇄공에게 넘겨 책을 찍을 때 ‘그 철학은 온 세상의 것이 된다’는 것이죠. 저희 또한 그처럼 독자들을 바라보고 독자 쪽으로 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신새벽)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한국 사회에 세대라는 유령이 떠돌고 있다”
<한편> 창간호의 주제를 두고 신새벽 편집자는 책 앞머리에 한국 사회에 떠도는 ‘세대’라는 유령의 개념과 실체는 모호하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정확한 이해’라고 강조했다. ‘청년팔이’라며 세대주의를 비판해온 문화연구자 김선기는 “세대주의라는 문화적 상상의 영향권 밖에 위치하기는 불가능”하다고 전제한 뒤 “오히려 청년을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며” 경계와 정체성을 교란해보자고 제안한다.
잡지 맨 앞에 배치된 ‘페미니즘 세대 선언’에서 박동수 사월의책 편집장은 ‘능동적 행위자’로 부상한 새로운 세대를 ‘페미니즘 세대’라고 이름 붙였다. 젊은 세대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페미니즘과 관계를 설정할 수밖에 없다며 ‘명명의 정치학’을 펼친 것이다. 중국정치연구자 하남석이 쓴 ‘오늘의 중국 청년들’과 베트남 인구정책 수립에 참여한 인구학자 조영태가 쓴 ‘밀레니얼은 다 똑같아?’는 아시아 다른 나라의 청년 세대를 한국과 비교한 보기 드문 글이다. 소수이지만 중국에선 청년들의 노학연대가 이뤄지기 시작했다는 점, 베트남 청년들은 한국과 달리 앞을 가로막을 기득권 세력이 없다는 점 등을 밝혔다.
사회학자 김영미는 ‘밀레니얼에게 가족이란’에서 청년 세대의 불평등은 가족 배경에서 시작된다고 설명한다. 영문학연구자 이우창의 ‘20대 남자 문제’는 오늘날 한국 청년 남성이 공유하는 반페미니즘의 중요한 논리를 분석했고 ‘1020 탈코르셋 세대’에서 작가이자 문화인류학 연구자인 이민경은 젊은 여성들의 탈코르셋 실천이 ‘꾸밈으로 저항’한 윗세대와 어떻게 다른지 분석했다. ‘세대, 기억의 공동체’에서 독일사 연구자 고유경은 ‘세대’ 개념이 나타난 프랑스혁명기를 조명하면서 소외된 주체들을 드러내 역사 관점을 다변화하는 일의 중요성을 힘주어 말한다.
‘<벌새>와 성장의 딜레마’를 다룬 이나라 이미지 문화연구자의 글과 ‘미래세대의 눈물과 함께’를 쓴 기후위기 활동가 정혜선의 글은 청년세대뿐 아니라 위기에 빠진 모든 이들의 ‘회복 탄력성’에 대한 사유를 돕는다.
이유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