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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훌륭한 문학에 허용되는 피의 양은 얼마?

등록 2020-01-31 06:00수정 2020-11-08 19:22

아룬다티 로이 소설 ‘지복의 성자’
부커상 ‘작은 것들의 신’ 이후 20년 만
카슈미르 중심 인도 사회 갈등 그려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3의 성’ 인물
이슬람 전사의 연인인 건축학도 여성
메시지 강하지만 시적 문장 매력적
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지음, 민승남 옮김/문학동네·1만6500원

아룬다티 로이의 등장은 가히 신화적이었다. 처음 쓴 소설 <작은 것들의 신>이 1997년 부커상을 받았고 40여 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어 600만부가 넘게 팔렸다. 이 작품은 여러 언론에서 ‘올해의 책’으로 뽑혔고, <타임>은 로이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으로 꼽았다.

데뷔작의 놀라운 성공 뒤 로이는 문학보다는 사회적 발언에 힘을 쏟는 것처럼 보였다. <보통 사람을 위한 제국 가이드> <9월이여 오라> <자본주의: 유령 이야기> 등의 사회 비평서를 통해 그는 인도의 계급 차별과 환경 파괴에서부터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느라 소설은 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던 그가 2017년 드디어 두 번째 소설 <지복의 성자>를 내놓았다. 첫 책 <작은 것들의 신>으로부터 20년 만이었다. 소설 앞부분은 1950년대 중반 인도 델리에서 남자와 여자의 성기를 한꺼번에 지니고 태어난 안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를 아들로 키우려는 부모의 바람과는 달리, 여성의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히즈라’(통념적인 여성이나 남성에 속하지 않는 제3의 성)에 매료된 안줌은 히즈라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 콰브가로 들어간다. 그 자신 히즈라인 소설 속 한 인물은 신이 “행복할 수 없는 생물체를 만들어보기로” 하고 히즈라를 만들었다고 말하지만, 안줌의 생각은 다르다. “모든 사람과 아무도 아닌 사람,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의 모임”이 바로 자신이라고 안줌은 말한다. 경계와 차별을 넘는 화해와 확장된 가능성의 상징으로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다.

“엄마가 되고 싶었”던 안줌은 사원 계단에 버려진 채 울고 있던 여자아이를 발견해서 콰브가로 돌아와서는 자이나브라는 이름을 붙여 주고 극진한 사랑을 베푼다. 그가 구자라트에 간 것은 병치레가 잦은 자이나브를 위해 성자의 축복을 받고자 해서였다. 그곳에서 이슬람교도들을 상대로 한 끔찍한 학살 현장을 목격하고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그는 콰브가를 떠나 마을 공동묘지의 가건물로 거처를 옮긴다. 그곳에서 점차 집과 살림을 정비하며 마음 역시 다스리게 된 그는 가난하고 갈 곳 없는 이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와, 누구도 받아주지 않는 주검을 염하고 간단하게 장례를 치러 주는 장례식장을 운영하게 된다.

1997년 첫 소설로 영예의 부커상을 움켜쥐었던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가 그로부터 20년 만에 두 번째 소설 <지복의 성자>를 내놓았다. ⓒMayank Austen Soofi
1997년 첫 소설로 영예의 부커상을 움켜쥐었던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가 그로부터 20년 만에 두 번째 소설 <지복의 성자>를 내놓았다. ⓒMayank Austen Soofi
소설은 이어서 여성인 틸로와 세 남자 무사, 비플랍, 나가로 이루어진 동년배 친구들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1980년대 중반 대학에서 연극을 함께 하며 만난 이들이 30여 년에 걸쳐 이어 가는 사랑과 우정과 갈등이 인도의 비극적 현대사와 맞물려 장대하게 흘러간다. 부유한 상류층 출신으로 역사학과 대학원생이었던 비플랍과 나가는 비밀스러운 과거와 남다른 삶의 방식을 지닌 틸로에게 각각 연정을 품지만, 틸로의 곁에는 언제나 연인인 듯 남매인 듯 붙어 다니는 무사가 있었다.

세월이 흘러 비플랍은 인도 정보국의 고위 공무원이 되고 나가는 유명 신문기자가 된다. 카슈미르에 발령 받아 근무하던 비플랍은 이슬람 전사들과 함께 있다가 체포된 틸로의 소식을 듣고, 비플랍의 연락을 받고 대신 틸로를 데려온 나가가 얼마 뒤 틸로와 결혼한다. 그러나 결혼 전이나 뒤나 틸로는 카슈미르의 이슬람 전사가 된 무사와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는다. 무사는 아내와 어린 딸이 군인들의 총에 희생되고 자신 역시 체포와 살해 위협에 쫓기게 되자 무장 투쟁의 길로 나선 터였다. “그가 알던 삶은 끝났다. 그는 카슈미르가 자신을 삼켰고 이제 자신은 그 내장의 일부가 되었음을 알았다.”

소설에는 틸로가 작성한 비밀 노트가 삽입되었는데, 거기에서는 카슈미르의 이슬람 전사들을 추적하고 살해함으로써 ‘카슈미르의 도살자’라는 별명을 얻은 인도군 소령 암리크 싱의 이야기가 비중 있게 소개된다. 싱은 나중에 캐나다를 거쳐 미국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그곳까지 자신을 쫓아온 이슬람 전사들 때문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자살을 택한다. 이 죽음을 두고 무사는 과거의 친구 비플랍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언젠가는 카슈미르도 그런 식으로 인도를 자폭하게 만들 거야. (…) 너희는 우리를 파괴하고 있는 게 아냐. 일으켜세우고 있는 거지. 너희가 파괴하고 있는 건 너희들 자신이야.”

따로 놀던 안줌과 틸로의 이야기는, 틸로가 시위하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광장에 버려진 아이를 데리고 안줌의 게스트하우스로 들어가면서 하나로 합쳐지게 된다. 틸로는 아이에게 무사의 죽은 딸 이름을 따서 ‘미스 제빈 2세’라는 이름을 붙여주는데, 아이의 생모가 뒤늦게 보낸 편지를 통해 아이에 관한 진실을 확인하게 된다. 아이 엄마는 자신이 마오쩌둥주의 인도 공산당 게릴라이며 아이는 경찰들에게 윤간을 당해 낳았다는 사실을 알린다. 아이 생모의 편지를 다 들은 이들이 “마치 나무나 어른 코끼리의 대형처럼 미스 제빈 2세를 둘러싸고 간격을 좁혀, 미스 제빈 2세가 자신의 생물학적 어머니와는 달리 보호와 사랑을 받으며 자랄 수 있는 물샐틈없는 요새를 만들었다”는 문장은 소설의 주제를 함축하는 듯하다.

<지복의 성자>는 정치적 메시지가 과도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러나 소설 곳곳에 박힌 로이 특유의 시적인 문장들은 <작은 것들의 신>이 주었던 감동을 되살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리고 문학과 정치적 메시지의 관계에 대해서라면, 틸로의 노트에 나오는 이런 대목에 그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담겨 있는 듯하다.

“나는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면서도 쓸거리가 많은 세련된 이야기를 쓰고 싶다. 카슈미르에서는 그게 불가능하다.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세련되지 못하다. 훌륭한 문학이 되기엔 너무 유혈이 낭자하다. 문제1: 그것은 왜 세련되지 못한가? 문제2: 훌륭한 문학에 허용되는 피의 양은 얼마인가?”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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