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전, 역사학자의 토론과 해석
오수창 지음/그물·2만4000원
<춘향전, 역사학자의 토론과 해석>은 오수창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가 춘향전의 여러 이본을 검토해 다양한 토론과 해석을 붙인 책이다. 역사학의 렌즈로 조선 후기 사회의 시공간을 검토한 점이 <춘향전>을 다룬 문학 분야 선행 연구들과 뚜렷하게 다르다. 조선 후기 역사전공자가 뜻밖의 주제를 파고들어 간 셈인데, 특히 2018년 한국의 미투 운동을 접하고 “문제는 현장”이라는 확신을 굳힌 뒤 책을 약속한 지 20년 만에 원고를 넘겼다고 지은이는 머리말에서 밝혔다.
책에서 검토한 이본은 1754년(영조 30)에 처음 문자로 쓰인 <만화본춘향가>부터 1929년 이광수의 <일설춘향전>까지 14개다. 조선 후기 변화하는 사회질서의 현장과 각 이본의 내용이 어떤 관계를 이루는지 면밀히 살핀 점이 흥미를 더한다. <춘향전>은 다양한 이본만큼이나 수많은 연구성과가 있기에 그만큼 갈피 잡기 힘든 텍스트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학술적 설명이 이뤄졌지만 이야기 전체를 일관성 있게 해명한 시도는 찾아보기 힘들다며, 지은이는 역사학에 기반을 둔 맥락적 분석 연구의 필요성을 밝힌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춘향뎐>(2000) 한 장면. 역사학자 오수창은 춘향이 협박과 회유에 굴하지 않고 사납고 거칠게 저항했으며 독자들은 그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고 설명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사실 21세기인 지금까지 춘향이 조선 후기의 신분 질서와 통치체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정치적 인간인지, 아니면 구태의연한 봉건 논리의 산물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결론 부분을 먼저 보면, 이 책은 <춘향전>의 역사적 성취를 조선 후기 사람들 삶의 진정성을 형상화했다는 데에서 찾았다. “기생 춘향이 조선 후기 국가권력의 불법과 폭력에 맞서는 장면을 통해 민의 실천을 집중적으로 그려냈다”고도 평가한다. 나이 어린 여성이 남원 고을 최고 권력자와 대결하며 사납고 거칠게 맞서는 장면, 춘향과 이도령이 시련과 고난을 이겨가며 사랑을 완성해가는 장면 등에서 작품 속 민중과 독자가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춘향전은) 그 시대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처절하고도 찬란한 저항의 현장이었다.”
책의 논리는 일관되고 주장은 선명하다. 지은이는 춘향이 당시 체제에 맞선 새로운 논리를 세웠다고까지 평가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한다. 당시 조선은 창기와 잔 관리를 곤장 60대에 처했다. 기생을 간음하는 일은 죄로 여겨 엄히 다스렸던 것이다. 그렇다고 조선체제가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존중한 것처럼 여기는 것도 지나치다. 무과에 급제한 인물이 평안도 또는 함경도에 갈 때 ‘방직’이라며 관기나 관비를 붙여주며 성을 제공하는 제도가 있었거니와, 이처럼 여성에 대한 폭력을 통치체제의 일부로 삼은 시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또의 수청 요구는 명백한 불법이었다. 다시 말해, 춘향의 저항은 흔치 않은 일이었으되 신분제와 통치이념에 대한 저항이라 보긴 힘들다는 것이다. “자신의 무죄를 확신하는 춘향, 그리고 그를 지지하는 민중의 의식이 현실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지은이는 설명한다. 춘향이 기생이냐 아니냐의 논쟁도 있지만 그를 기생으로 보는 것이 맞으며 그러나 평범한 기생의 목숨 건 저항이야말로 사회적 큰 의미를 지녔다고도 덧붙였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춘향뎐>(2000)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춘향과 이도령의 성적인 접촉 장면을 다룬 선행 연구들은 그들 사랑의 현장이 지나치게 외설적이라거나 성별과 신분 권력에 의한 강간이라고까지 분석하기도 했지만, 지은이는 서로 존중과 흠모의 정을 나눈 두 사람이 성애의 현장까지 이르는 정당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안전한 공간에서 사랑을 이룩했고, 그런 춘향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신관 사또에게 목숨 걸고 투쟁하는 이야기의 전개는 논리적 근거를 가진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질펀하고 쾌락적인 성애의 본질은 “외설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두 사람의 사랑의 밀도를 설득하는 장치”임을 책은 증명한다. 이도령이 춘향을 가장 존중하는 이본인 <완판 84장본 열녀춘향수절가>에서 사랑 장면이 가장 노골적인 데는 이유가 있다고 본다.
그 밖에도 이 책은 <완판 84장본>에서 춘향이 “피가 솟는 매질 속에서 사또에게 죽음으로써 보복하겠다고 다짐하는 치열한 장면”이 나오는 점이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본에서 신관 사또가 탐관오리라는 성격보다 지배체제나 국가권력을 상징하는 모습이 짙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독자들이 통치체제와 국가권력에 대립하는 구도로 춘향의 저항을 인식했다는 설명인데, 조선 후기 당시 독자들이 등장인물 중 누구에게 가장 투사하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완판 84장본>에서 나타난 평등성 또는 민중의식은 근대에 이르러 퇴행한다. 대표적인 근대 지식인인 춘원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연재해 1929년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펴낸 <일설 춘향전>은 성평등과 신분차별 타파를 표방하나 실은 춘향의 종속성이 유례없이 강화되고 인간적 주체성보다 정절을 부각하는 등 전통적 문학보다 훨씬 차별적이고 권위적이었기 때문이다.
책 말미에 지은이는 <춘향전>이 결코 조선시대 통치질서를 벗어나지 않았기에 사회변혁 이념을 제시하며 독자를 선도했다는 민중주의적 분석의 함정에 빠져서도 안 되지만 새로운 이념을 제시하지 않았다며 성과를 부정하는 허무주의에 빠져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의 역사적 사명은 조선 후기 사람들의 삶의 현장을 형상화하고 민중의 실천을 그려낸 데서 찾아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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