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를 꿈꾸는 이들로부터 “영감을 어디서 얻나요?”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러면 “온갖 데서 얻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머리 위로 영감이 쏟아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등단작인 <표백>은 내 대학 시절의 경험과 도스토옙스키의 <악령>,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엮은 것이다. 다음 책인 <뤼미에르 피플>은 단편소설 열편이 있는 연작 소설집인데, 서울 신촌의 한 오피스텔에서 혼자 살면서 했던 공상들이 고스란히 작품의 단초가 되었다. 내가 만약 내일 갑자기 전신 마비가 되면 가족에게든 회사에든 누가 내 처지를 연락해주지 하는 두려움에서부터, 그 건물에 입주해 있던 도통 정체를 알 수 없었던 이상한 사무실들에 대한 고약한 상상까지. 세 번째 책인 <열광금지, 에바로드>는 신문기자 시절 취재하면서 알게 된 사연에 허구를 보탠 것이다.
그러니까 그 영감들에는 별 패턴이 없었다. 지난 추억이기도 했고, 인상 깊게 읽은 책이기도 했고, 일상의 걱정거리이기도 했으며 신문기사이기도 했다. 책의 뼈대가 된 핵심 모티프들이 그렇다는 것이고, 근육과 혈관, 피부를 이룬 자잘한 아이디어는 정말이지 온갖 곳에서 얻었다. 그냥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써먹고 있다는 표현이 옳다.
“영감을 어디서 얻나요?”라는 질문을 하는 작가지망생들도 아마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 모든 것이 영감의 원천이기는 하겠지만, 그중에서도 더 질 좋고 풍부한 영감의 광맥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계속해서 그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그런 금광은 없다. 더군다나 내게 영감을 주는 것이 타인에게 영감을 주지 않을 수 있으며, 나 한 사람에게도 지난달까지 폭포처럼 영감이 쏟아지던 장소가 오늘은 무미건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의 창작에 참고하기 위해 다른 작가에게 영감의 원천을 묻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라는 얘기다.
쾅쾅쾅쾅 하자 빰빰빰빰 했다고?
자기 손으로 창작을 하지 않는 이들은 영감을 오해하는 것 같다. 집주인이 쾅쾅쾅쾅 하고 문을 두드리자 안에 있던 베토벤이 “오, 이거야!” 하고 소리치면서 빰빰빰빰 하고 운명 교향곡 앞부분 악보를 썼다는 식으로. 작곡가들에게는 영감이 그렇게 친절하게 오는지 모르겠지만 작가들에게는 아니다. 완전한 형태로 내려오는 영감은 없다. 모든 영감은 다 불완전한 형태로 온다. 그걸 완성하는 것이 작가의 일이다.
불완전한 영감을 받은 사람의 반응은 이렇다. ‘저게 뭐지?’ ‘이거 뭔가 이상한데.’ ‘뭐야, 기분 나빠.’ ‘오, 대박.’ ‘엥?’…. 아마 오늘 아침에 일어나 이 글을 읽는 바로 이 순간까지도 저런 생각들을 몇 번이고 했을 것이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도 하고, 지하철 승강장에서도 하고, 버스 옆면 광고를 보면서도 하고, 휴대폰으로 뉴스를 검색하면서도 했을 것이다. 그것들이 다 영감이었다. 수면 위로 조금 자기 모습을 드러낸.
긴 낚싯대처럼 질문들을 던져 그 영감 덩어리를 낚아야 한다. 던져야 할 질문들은 이렇다. ‘나는 이걸 왜 이상하다고 여겼을까? 여기서 어떤 점이 이상한 건가?’ ‘이걸 내가 왜 기분 나쁘게 받아들였지? 이 부분인가? 저 부분인가?’…. 해답을 찾아내라는 말이 아니다. 그 눈길 끌고 이상하고 대박이었고 ‘엥?’이었던 파편 앞뒤에 당신만의 이야기를 보태라는 것이다. 당신에게는 이미 그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다. 그러니 눈앞을 지나가는 수많은 사물 중 바로 그것에 멈춰 ‘뭐야, 저거’ 하고 생각했던 거다.
신문기자 시절, 일본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 관련 다큐멘터리 상영회를 취재하러 갔다.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기획한 난센스 같은 이벤트에 진지하게 도전하고 보상을 받은 청년 두 사람이 그 과정을 찍은 다큐멘터리였다. 별 기대 없이 작품을 봤다가 뜻밖의 감동을 받은 나는 그날 밤 내내 생각했다. ‘내가 왜 감동을 받았지? 난 에반게리온 팬도 아닌데(건담 팬인데).’ 에반게리온이라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그때까지 한 편도 본 적이 없었다.
간질간질한 기분으로 자문자답하면서 이야깃거리를 여러 개 찾아냈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답안이 떠올랐다. 둘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먼저 그 다큐멘터리가 삐딱하면서 동시에 진솔한, 모순적인 성공담이라는 점에 감동받았다. 그 모순은 우리가 삶에서 추구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 신선한 각도로 한 줄기 빛을 비춘다. 또 두 청년이 아무런 정규 수업도 받지 않고 그렇게 놀라운 완성도로 촬영에서부터 영화음악 작곡까지 해냈다는 사실도 감동적이었다. 야생에서 진짜 예술가들이 탄생하는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말로 잘 표현되지 않는 감동’이 하룻밤의 궁리를 거쳐 ‘이걸 이 방향으로 이렇게 쓰면 될 것 같다’고 말하는 영감이 되었다. 빰빰빰빰. 나는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에게 소설을 쓰기 위한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요청했고, 나중에 수림문학상을 받은 소설인 <열광금지, 에바로드>를 쓰게 되었다.
신문기자로 일한 덕을 봤느냐고 묻는다면 분명 그렇다. ‘어, 이거 왠지 이상한데. 어떻게 글로 쓸 수 없을까?’ 하고 아이템을 고민하는 훈련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훈련은 꼭 신문사 편집국에서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일상에서 누구나 실천할 수 있다. 참고로 〈에바로드〉라는 다큐멘터리가 나왔다는 소식을 인터넷에서 접하고 작은 카페에서 저녁에 열린 상영회에 가는 데 기자라서 유리한 점은 없었다.
영감을 가라앉히는 것은 무엇인가
물론 ‘저게 뭐지?’ 하는 느낌들을 적어두는 습관이 있으면 좋다. 6회에서도 썼지만 기록은 각자 편한 대로 하면 된다. 나는 예전에는 늘 수첩을 들고 다녔고 스마트폰을 구입하고 얼마 동안은 몇 가지 메모 앱을 번갈아 썼다. 요즘은 그냥 간단하게 사진을 찍어두거나 떠오른 단상을 녹음한다. 그걸로 충분하다.
이런 기록을 쌓고 정리하는 데 너무 공을 들이지 말자. 레고 조각을 산더미같이 모아서 형태별로 색깔별로 분류하는 작업이나 다름없다. 쓸데없다는 말이다. 서너 조각이라도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면서 서로 붙이고 이어보는 일이 중요하다. 중요하다고 별표를 몇 개나 그려놓은 메모가 지금은 무슨 뜻인지 봐도 모르겠다고? 지워라. 막 잠이 들려고 하는데 좋은 생각이 나서,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엄청 갈등했다고? 그냥 푹 자자. 영감은 앞으로도 무수히 쏟아질 테니.
영감을 얻기 위해 창작 여행을 떠나는 게 효과가 있을까? 있다. 그런데 효율이 너무 떨어진다. 창작 여행의 본질은 낯선 곳에 가서 ‘저게 뭐야? 와, 신기하네’ 하는 감각을 많이 느끼고 창작의 재료를 얻는 데 있다. 그런데 같은 재료를 일상에서도 쉽게 모을 수 있다. 영감은 신기한 곳에서 신기한 것을 보는 데서 얻을 수도 있지만, 평범한 걸 신기하게 봐서 얻을 수도 있다. 여러모로 후자가 가성비가 높다. 똑같이 잘 써내도 전자는 소재주의라는 의심을 받을 수 있는데 후자는 통찰력이 있다는 찬사를 듣는다.
어떤 분들은 “내 주변에는 도통 신기한 게 없는데” 하고 말씀하실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신기하다’는 표현을 ‘부조리하다, 비상식적이다, 말이 안 된다’로 바꿔보자. 회사나 학교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조리 있고 상식적인 사람들인가? 시가나 처가 친척들도? 당신이 속한 팀이나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말이 되는 일들만 벌어졌나? 아니라면 그에 대해 써보자.
그 사람은 왜 그럴까, 이 조직은 왜 이럴까, 하는 생각은 최고급 영감의 씨앗이다. 거기에서 나온 글감은 현실에 뿌리가 있고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다. 진상을 규명하라는 게 아니다. 문학이라면 이야깃거리를, 비문학이라면 가설을 만들어내 보라는 것이다. 그 사람은 어떤 상처나 콤플렉스를 감추려는 걸까? 뭔가를 두려워하고 있나? 지금 이 조직의 장이 성과를 줄여서라도 누군가를 견제하고 싶어 하는 걸까? 이 현상에 역사적, 문화적 맥락이 있다면 그게 뭘까?
그리고 이런 영감을 가라앉히는 마음 한구석의 나태한 목소리를 경계하자. 그 음성은 이렇게 말한다. ‘아유, 모르겠다.’ ‘사는 게 본디 수수께끼지, 뭐.’ ‘세상에 원래 이상한 인간들이 있어.’ ‘밥이나 먹자.’ 그런 말을 들으면 영감 덩어리는 다시 수면 아래, 무의식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다.